윤가은 감독 6년 만의 신작 ‘세계의 주인’(22일 개봉)은 평범한 여고생의 일상을 그리는 듯이 시작한다. 고교 2학년 ‘주인’(서수빈 분)은 빈 교실에서 남자친구와 서툰 키스를 나누고, 친구들과 웃으며 춤을 춘다. 집에서는 남동생의 마술 공연을 보며 웃고, 과음하는 엄마 ‘태선’(장혜진 분)을 타박하며, 집 안 구석구석을 쓸고 닦는다. 단란해 보이는 일상 뒤로, 주인의 지난 상처가 서서히 밝혀지며 영화는 익숙한 청춘 영화의 풍경에서 다른 결로 나아간다.
지난 15일 열린 언론시사회에서 윤 감독은 손편지를 통해 취재진에게 스포일러 자제를 당부했다. 그만큼 이 작품은 사전 정보 없이 볼수록 더 큰 울림을 주는 영화다.
주인은 성(性)과 사랑, 감정을 배우고 탐색하는 청소년기 한가운데에 있다. 20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윤 감독은 “성과 사랑을 경험하는 10대 청소년의 이야기를 10년 이상 품어왔다”고 말했다. 이어 “가장 사실적인 경험, 진짜인 순간을 담으려다 보니 사랑과 공존하는 트라우마와 공포를 함께 다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제목 ‘세계의 주인’은 중의적으로 해석된다. 주인이라는 소녀가 자기 삶의 주인(主人)으로 세계 속을 살아가고, 세계의 한 구성원으로 존재함을 선언한다. 어린 나이에 큰 상처를 입었고 앞으로도 상처받으며 살아갈 테지만, 자기 인생의 주체성과 통제력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로도 읽힌다. 큰 고통을 겪은 생존자들, 트라우마를 안고 매일 뚜벅뚜벅 살아가는 세상의 여러 주인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피해자’로만 살지 않으며, 그들의 삶이 단 하나의 비극적 사건으로 요약될 수 없다는 사실을 영화는 보여준다.
이 영화는 지난달 열린 제50회 토론토국제영화제 플랫폼 부문에 한국 영화 최초로 초청받았다. 같은 달 중국 핑야오국제영화제에서는 중국 거장 지아장커 감독의 극찬 속에 2관왕을 차지했다.
윤 감독은 봉준호 감독이 주목한 ‘차세대’라는 수식어를 오랫동안 달아 왔다. 2020년 봉 감독이 영국 영화잡지 ‘사이트 앤드 사운드’와 함께 선정한 차세대 감독 20인 중 유일한 한국 감독으로 꼽히면서다. 그러나 ‘차세대’라는 표현은 이제 무색해 보인다. 윤가은은 더는 내일의 이름이 아니다. 오늘 한국영화의 얼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