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11월 4일 여러 신문에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이 사흘 전인 11월 1일 오후 7시 먼 길을 떠났다는 부음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에는 그가 황성신문의 주필이라든가 서북학교장, 독립신문사 사장과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냈다는 약력이 소개되었다. 다만 그의 출생지가 황해도 황주임에도 평안북도 영변으로 잘못 소개하였으며 그의 출생 연도가 1859년생임에도 미처 달지 못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11월 5일 모 신문은 추도사에 그가 계신 곳이 “조선사람이란 비애도 없을 것이며 차별도 없고 조선사람이나 어느 나라 사람이나 모두 마찬가지의 세계일 것이다. 절대로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계일 것이다”라는 의미심장한 구절을 넣었다. 당시 일제의 검열을 의식하여 백암이 독립운동가였음을 차마 소개하지 못하고 이런 방식의 기사로 식민지 조선이 처한 현실을 꼬집으며 백암이 꿈꾸었던 모든 민족이 ‘절대로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계’를 부각시켰다.
필자가 백암의 저서를 제대로 접한 것은 군 복무 시절이었다. 대학원 합격 소식을 들은 직후 군에 자원입대하였고 얼마 뒤 병장으로 진급하자마자 진중문고(陣中文庫)에 눈이 갔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책이 ‘한국통사(韓國痛史)’였다. 학부 시절에 좀처럼 손이 가지 않았던 이 책이 여기서는 왜 이렇게 반가웠는지 몰랐다. 전역을 앞둔 병영 생활의 여유이기도 하거니와 전역 이후 대학원 복학을 앞둔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훗날 군산대 전임강사 시절 국사강독 교재로 이 책을 선택하고 학생들과 함께 원문을 정독하면서 이 책의 매력에 심취했다. 이후 2004년 서울대로 옮긴 뒤 규장각고전총서 기획위원회에서 근대 고전으로서 이 책의 가치를 언급하며 역해(譯解) 대상으로 추천했고 결국 필자가 맡아 발췌 역해본을 출간했다.
김태웅 서울대 교수·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