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삶이 급변해도, 사라지지 않는 본질적 가치들. 예술은 시대의 변화를 민감하게 반영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것들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기술의 발전은 예술의 경계를 확장하며 우리에게 새로운 문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성의 상실이라는 위험을 품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기술이 발전할수록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를 더욱 면밀히 성찰할 필요가 있다. 결국 중요한 건 수단이나 도구가 아닌, ‘의도’와 ‘목적’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칭기즈칸
두 주인공이 자동차를 타고 사랑의 세계에 이르렀듯, 김아름에게 기술은 사랑을 향한 매개다. 그는 기술 과학 시대에 우리가 향해야 할 종착점은 사랑이고, 기술이 인간에 대한 애정을 품을 때 미래에 대한 희망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자동차 내비게이션 화면 속에는 연애편지부터 휴대전화 속 사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하트 아이콘까지 시대에 따라 변주된 사랑의 징표들이 등장한다. 모습을 달리했을 뿐, 사랑은 언제나 인간의 근원으로 존재해 왔다. 작가는 사랑이 우리 안에 내재된 본성이자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치임을 드러낸다. 따라서 주인공들이 향한 ‘사랑의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두려움의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지나왔고 겪고 있으며 계속해서 마주하게 될 내면의 세계이다.
◆영원의 물방울
주인공들을 태운 자동차가 땅이 아니라 물 위를 달린다는 점은 김아름의 작업에서 물이 지닌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그는 영상뿐 아니라 회화, 드로잉, 조각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작업하는데, 비가시적 세계를 시각화하는 방법으로 종종 물의 형상과 물성을 활용한다. 평면에서는 수채화를 주 매체로 사용하는 그는 물감이 종이에 스며들어 형상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일종의 ‘의식(儀式)’이라 칭한다. 그에게 작품을 만드는 물리적 행위에는 정신적 함의가 담겨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1884∼1962)가 물을 인간의 상상과 내면 세계를 열어주는 매개이자 시적 사유의 근원으로 보았던 것처럼, 김아름은 물에서 사랑과 영원을 상상한다. 고정된 형태 없이 흐르고 씻어내는 물은 그의 작품 속에서 내면을 따라 끊임없이 흐르는 사랑의 물줄기가 된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바다는 사랑의 심연이 되고, 그 안에 수많은 생명을 품어 안는다. 물은 이처럼 순간과 영원이라는 상반되는 개념을 동시에 드러내며, 김아름의 예술세계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빚어진다. 가볍고 투명하지만 어딘가 근엄해 보이는 물방울 요정으로, 혹은 텅 빈 종이에 스며들어 영원을 담아내는 공간으로 피어난다.
◆안개가 걷힌 길을 따라
구름이 물방울이 되어 바다로 흘러가고, 다시 공기 속으로 스며들어 구름으로 돌아가듯, 변치 않는 세상의 원리는 백남준과 김아름의 예술 세계를 하나로 엮어낸다. 두 작가는 차가운 기술에 인류의 보편적 가치라는 옷을 입히고, 기술을 사랑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칭기즈칸이 복권한 그 자리는 사실 김아름의 주인공들이 향하던 미래이기도 하다. 과거가 미래가 되고 미래가 과거가 되는 순간, 시간은 선형적 흐름을 벗어난 새로운 장이 된다. 백남준의 전자 초고속도로와 김아름의 물길은, 따라서 하나로 연결된 길이다. 사랑으로 흐르는 이 길 위에서 두 작가는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다.
백남준과 김아름의 자아가 투영된 주인공들은 기술을 등에 업거나 그 위에 탑승한 채, 확신을 가지고 달려 나간다. 인터넷의 보급과 인공지능의 보편화라는 서로 다른 시대의 길목에 서 있지만, 이들에게는 일말의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는다. 천진하지만 확고하며, 고요하고도 장엄한 이들은 침묵의 확신으로 우리를 그 길로 인도한다. 안개가 걷힌 길을 따라, 투명하게 반짝이는 사랑의 미래 속으로.
신리사 미술사·학고재 기획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