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에서 진보 성향의 무소속 정치인이 대통령에 취임한 뒤 아일랜드 공화국과 영국령 북(北)아일랜드의 통합 여부를 묻는 주민 투표 실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즉 브렉시트 이후 영국 정부에 반감을 느끼는 북아일랜드 주민이 늘어난 만큼 만약 투표가 이뤄진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장담할 수 없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아일랜드 섬의 대부분은 아일랜드 공화국 영토이나 섬의 북부 일부는 아일랜드가 독립할 당시 영국령으로 남는 길을 택해 오늘날까지 국경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15일(현지시간) BBC 방송에 따르면 아일랜드의 좌파 정당이자 야당인 노동당의 이바나 바식 대표는 이날 열린 노동당 연례 회의에서 연설을 통해 아일랜드 통합 여부를 묻는 주민 투표 실시를 강조했다. 바식은 영국과 아일랜드 영국 정부를 향해 “북아일랜드에 대한 국경 투표(border poll) 실시 일정을 조속히 확정하라”고 촉구했다. 그는 “우리 당으로서는 이 문제를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고 여긴다”면서도 “다만 국경 투표를 언제까지 실시한다는 명확한 기한은 반드시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국경 투표’란 1998년 체결된 벨파스트 협정(일명 ‘성 금요일 협정’)에 규정된 절차다. 당시 북아일랜드 수도인 벨파스트에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중재 아래 영국, 아일랜드 그리고 북아일랜드 대표가 협정을 맺었다. 여기에는 △북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직접 통치 중단 △북아일랜드 자치 정부 수립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주민들의 자유로운 교류 보장 등 내용이 담겨 있다.
특히 북아일랜드 주민 과반이 북아일랜드가 영국의 연합왕국(United Kingdom) 체제에서 빠져나와 아일랜드 공화국과 합쳐 통합 아일랜드를 구성하기를 바라는 것으로 보인다면 해당 안건을 주민 투표에 부칠 수 있도록 했는데, 이것이 바로 ‘국경 투표’ 조항이다.
캐서린 코널리 신임 아일랜드 대통령도 대선 선거운동 과정에서 ‘새 대통령 임기 중 국경 투표가 실시되길 바란다’는 의사를 표명한 바 있다. 코널리 대통령은 무소속 후보로 출마했지만 진보 진영 그리고 아일랜드 민족주의 성향이 짙은 정당들의 지지를 받아 당선됐다. 그는 취임사에서 “대통령으로서 가장 먼저 북아일랜드를 방문하는 것을 기대하고 있다”며 “아일랜드 섬 전역에 걸쳐 포용적인 대화를 촉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일랜드는 과거 수백년간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민족주의자들이 처절한 항쟁을 벌인 끝에 20세기 들어 독립국이 되긴 했으나 아일랜드 섬의 북부는 영국령 북아일랜드로 남았다. 이를 ‘불완전한 독립’으로 규정한 민족주의자들은 오랫동안 북아일랜드에서 영국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를 하나로 합치려는 노력을 전개했다. 아일랜드공화국군(IRA) 같은 단체가 대표적인데, 이들은 영국 왕실 및 정부의 고위 인사들을 겨냥한 테러로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기도 했다.
벨파스트 협정 체결에 따라 IRA도 기존의 폭력 투쟁 노선을 접고 무장을 해제한 뒤 북아일랜드 자치 정부를 지지하는 길을 택했다.
그런데 브렉시트로 사정이 달라졌다. EU 회원국인 아일랜드와 EU 회원국이 아닌 영국에 속한 북아일랜드 간에 새로운 장벽이 생겨난 탓이다. 애초 브렉시트에 반대한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이 북아일랜드에서 다시 득세하며 ‘영국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2024년에는 아일랜드 민족주의 정당인 신페인당 소속이자 IRA 조직원의 후손인 미셸 오닐(48)이 북아일랜드 자치 정부 총리로 취임하기도 했다. 신페인당은 아일랜드 대선에서 코널리 대통령을 지지했으며, 오닐 총리는 대통령 취임식에 직접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