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이 앞당긴 제헌절의 공휴일 재지정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1975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엔 ‘국제연합일’(10월 24일)이란 이름의 공휴일이 있었다. ‘유엔절’이라고도 불렸다. 유엔 창설을 기리기 위한 기념일인데, 6·25 전쟁 당시 유엔군 참전 덕에 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한국 정부가 유엔을 중시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하나 1960년대를 거치며 아시아·아프리카에 출현한 신생 독립국들이 대거 회원국으로 가입하며 유엔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겉으론 ‘비동맹’ 노선을 표방하면서도 정서적으로는 공산주의와 더 가까운 이 신흥국들은 대체로 북한 편을 들었다. 급기야 1970년대 중반 북한이 유엔 산하 국제기구에 정식으로 가입하는 기막힌 일까지 벌어졌다. 배신감을 느낀 한국 정부는 1976년 국제연합일을 공휴일에서 빼 버렸다.

 

2024년 12월 3일 오후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직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국회 본청에 진입하려는 계엄군과 이를 막으려는 시민들이 대치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국제연합일을 대신해 1976년부터 공휴일 지위를 얻은 것이 바로 ‘국군의날’(10월 1일)이다. 그런데 불과 15년 만인 1991년 당시 노태우정부는 국군의날을 달력의 이른바 ‘빨간 날’에서 지웠다. 10월 3일이 공휴일인 개천절이고 그 즈음에 추석(음력 8월 15일) 연휴가 도래하기도 하는데, 10월 1일까지 계속 휴일로 운영한다면 나라 경제에 악영향을 끼치고 근로자들의 근무 기강도 해이해진다는 이유를 들었다. 같은 논리에서 ‘한글날’(10월 9일) 역시 공휴일에서 해제됐다. 일요일은 물론 토요일도 쉬는 주5일제 시행이 본격화하며 2007년부터는 ‘제헌절’(7월 17일)마저 공휴일 지위를 잃었다. 과거 강대국의 식민지였거나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경험이 있는 나라에서 제헌절이 최대 국경일로 여겨지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였다.

 

1991년 이후 국어학자 등 학계와 문화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글날을 공휴일로 재지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봇물을 이뤘다. 2000년대 들어 한류가 확산하고 ‘한글이 세계 최고의 우수한 문자’란 인식이 널리 퍼지며 정권도 마음을 돌렸다. 박근혜정부 시절인 2013년 한글날은 22년 만에 공휴일 지위를 되찾았다. 당시 이를 관철시킨 문화체육관광부 간부들이 “우리가 바로 21세기의 세종대왕”이란 자부심 섞인 농담을 주고받던 것이 떠오른다. 비슷한 맥락에서 공휴일로서 제헌절 부활을 촉구하는 목소리 또한 커졌다. 2024년 7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은 제헌절의 공휴일 재지정을 골자로 하는 법안을 발의하며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대한민국 헌법의 제정과 공포의 의미를 기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24년 12월 4일 오전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국회 요구를 받아들여 전날 밤에 선포한 비상계엄을 해제한다고 밝히는 장면이 TV로 생중계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국회 행정안전위원회가 17일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제헌절을 다시 공휴일로 지정하는 내용의 ‘공휴일에 관한 법률’(공휴일법) 개정안을 여야 합의로 의결했다. 행안위 전체 회의를 거쳐 국회 본회의까지 통과하면 2026년부터 제헌절이 공휴일로 부활할 전망이다. 이를 두고 12·3 비상계엄 사태 후 정치인과 관료들은 물론 일반 국민 사이에도 헌법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진 점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계엄 선포로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려던 윤석열 전 대통령의 시도는 “국회가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계엄의 해제를 요구한 때에는 대통령은 이를 해제하여야 한다”고 규정한 헌법 77조 5항에 막혀 불발에 그쳤다. 불법 계엄을 막아낸 헌법의 승리가 제헌절 의미를 부각하는 계기로 작용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