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경제에 고환율·고물가·고금리 이른바 ‘3고(高)’의 공포가 다시 드리우고 있다.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한 증시 랠리와 경제성장률 상향 조정이란 ‘훈풍’에 가려졌을 뿐 시한폭탄처럼 우리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문제는 최대 위협 요소였던 한·미 관세 협상이 타결됐음에도 당장 ‘3고’를 타개할 마땅한 돌파구가 없다는 점이다.
‘3고’의 시작이자 끝은 사실상 경제의 종합성적표라고 할 수 있는 환율이다. 12·3 비상계엄 직후 급등한 원·달러 환율은 새 정부가 들어선 후에도 1400원대 중반에서 내려오지 않고, 원화는 올 들어 주요국 가운데 최약체로 추락했다.
23일 한국은행과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한국의 실질실효환율 지수는 10월 말 기준 89.09(2020년=100)로, 비상계엄 사태 여파로 국내 정치 불확실성이 최고조에 달한 올해 3월 말의 89.29보다도 더 낮다. 금융위기 당시 2009년 8월 말(88.88) 이후 16년2개월 만에 최저치이며,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11월 말 당시(86.63)와도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BIS 통계에 포함된 64개국 중에 일본(70.41), 중국(87.94)에 이어 세 번째로 수치가 낮았다. 10월 한 달간 실질실효환율 하락 폭(-1.44포인트)은 뉴질랜드(-1.54포인트)에 이어 두 번째로 컸다.
실질실효환율은 한 나라의 화폐가 상대국 화폐보다 실질적으로 어느 정도의 구매력을 가졌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다. 기준 시점과 현재 시점 간의 상대적 환율 수준을 평가하는데 100을 넘으면 기준 연도 대비 고평가, 100보다 낮으면 저평가돼 있다고 간주한다.
이달에도 원화의 실질실효환율은 추가 하락할 가능성이 있다. 21일 원·달러 환율은 전일 대비 7.7원 오른 1475.6원에 주간거래(오후 3시30분)를 마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관세 인상 이슈가 불거졌던 지난 4월9일(종가 1484.1원) 이후 최고 수준이다.
환율 상승 여파로 물가도 들썩이고 있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는 117.42(2020년=100)로 1년 전보다 2.4% 올랐다. 이는 지난해 7월(2.6%) 이후 1년3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치다. 한은이 발표한 지난달 수입물가지수(2020년=100)도 138.17로, 지난 1월(2.2%) 이후 9개월 만에 가장 높았다.
금리도 우상향하고 있다. 서울채권시장에 따르면 지난 21일 10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연 3.271%로 거래를 마쳤다. 지난 4월 말 금리인 2.563%와 비교하면 0.7%포인트 이상 올랐다. 국고채 금리의 상승은 은행채 금리를 끌어올린다. 은행채 1년물 금리는 지난 8월14일 2.498%에서 21일 2.791%까지 올랐다. 한국은행이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5월까지 기준금리를 인하했지만, 정작 시장금리는 치솟은 것이다. 금융기관에서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기업과 가계부채 비중이 큰 서민 모두 이자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
국내외 주요 기관들은 3분기 깜짝 실적에 고무돼 올해와 내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상향조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반도체 등 일부 업종의 호황 효과일 뿐, 우리 경제가 전체적인 회복세에 들어선 것으로 보긴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오히려 ‘3고’의 압박이 서민들의 체감 경기를 더 악화시킬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안동현 서울대 교수(경제학)는 “침체한 우리나라 실물 경제만 보면 금리를 더 낮춰야 하지만, 부동산 문제와 고환율, 고물가에 막혀 통화정책을 펴지 못하고 있는 답답한 상황”이라며 “‘슈퍼 사이클’에 접어든 반도체 수출 증가로 점차 경제성장률은 올라가겠지만, 정작 서민들의 체감 경기는 개선되지 않아 괴리가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