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신세 많이 졌습니다”…연기에 평생 바친 故 이순재가 남긴 말들

현역 최고령 배우로 활동해온 이순재가 25일 새벽 별세했다. 향년 91세. 한평생 연기에 열정을 불태웠던 고인은 생전에 다작 배우로서 연기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을 자주 드러냈다. 

 

현역 '최고령 배우'로 활동해온 배우 이순재가 별세했다. 연합뉴스

이순재는 2016년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연기란 오랜 시간 갈고 닦아 모양을 내야 하는, 완성할 수 없는 보석”이라며 “배우라면 자신이 맡은 배역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며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2018년 영화 ‘덕구’에 출연하면서는 “별의별 종류의 영화에 다 출연해봤다. 주연도, 단역도, 악역도, 멜로 연기도 다 해봤다”면서 “배우가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무조건 작품 그 자체”라는 말을 남겼다. 

 

또 2008년 모교 서울대에서 열린 관악초청강연에 연사로 나서서는 “지금도 연기를 잘 선택했다고 생각한다”며 “나를 다 털어내고 평가받아서 수익을 올리는 거라 일단 남에게 피해를 안 끼친다. 또 정년이 없다”고 웃음기 섞인 진심을 내비치기도 했다. 

 

 

평생 연기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던 고인은 ‘대배우’ ‘국민배우’로 통했지만 젊은 세대에서도 인기를 누린 드문 원로배우이기도 했다. 칠순에 시트콤·팔순에 예능 그리고 구순에 새로운 연극 작품에 출연하는 등 끊임없이 새로운 연기에 도전했다.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 시리즈에서 근엄한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코믹 연기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고, ‘야동 순재’ 캐릭터로 어린이 팬까지 생길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예능 ‘꽃보다 할배’에서는 고령에도 지치지 않는 체력과 열정을 보여줬다. 촬영 당시 이순재는 강행군에도 “나이 먹었다고 주저앉아 대우나 받으려는 것은 늙어 보이는 것이다”라며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또 “인생은 긍정적으로 보면 좋다. 이제 우리 나이는 닥치면 닥치는 대로 살아야 한다. 그럴 때 나는 ‘당장 내일 할 일이 있으니까. 끝을 생각하기보다 현재에 최선을 다해야지. 팔십이라는 것도 빨리 잊고, 아직도 육십이구나’하며 산다”며 인생철학을 내비쳤다. 

 

연기 열정 불태운 '영원한 현역' 이순재 별세. 뉴시스

원로 배우로서 드라마 업계의 잘못된 관행과 상업주의를 꼬집는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2010년 MBC 시트콤 ‘지붕뚫고 하이킥’ 종방연에서 “작업 과정은 지옥이었다. 젊은 친구들이 생사를 걸고 한 작품”이라며 “이제는 완전한 사전제작제로 들어가야 한다”고 작심 발언을 내놨다.

 

이듬해 MBC 드라마 ‘마이 프린세스’가 이른바 쪽대본 논란에 휩싸이자 “어느 나라가 이렇게 드라마를 만드느냐”며 “외주제작을 의뢰할 때 적어도 열흘 전에 대본을 넘겨 검사할 시간을 달라는 계약을 해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후배 연기자들에게는 엄격한 선배이자 멘토였던 그는 “배우들이 한 단계 뚫고 더 올라가려는 노력이 있어야 세계적인 수준으로 도약할 수 있다”며 “만날 깔끔하게 멋 내는 게 배우가 아니라 역할을 위해 항상 변신하는 게 배우”라고 말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정계에 몸을 담기도 했지만 “정치 생활 8년간 단 한 번도 행복하지 않았다. 나의 길은 연기라고 생각했다. 나에겐 연기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고인이 생전 마지막으로 공식 석상에서 남긴 수상 소감도 회자되고 있다. 그는 지난해 12월 31일 KBS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받은 뒤 “오래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온다”며 “보고 계실 시청자 여러분께 평생 신세 많이 지고 도움 많이 받았다고 말하고 싶다”는 소감을 밝혀 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줬다.

 

 

지난해 KBS 연기대상 수상 당시 모습. 연합뉴스

연예계에서도 추모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후배 연기자 정보석은 이날 SNS를 통해 “선생님, 그동안 너무나 감사했습니다”라며 “연기도, 삶도, 그리고 배우로서 자세도 많이 배우고 느꼈습니다”라는 글로 고인을 애도했다. 정보석은 2009년 방송된 MBC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에 고인과 함께 출연한 후 인연을 이어왔다. 그는 “제 인생의 참 스승이신 선생님, 선생님의 한 걸음 한 걸음은 우리 방송 연기에 있어서 시작이고 역사였습니다”라며 “부디 가시는 곳에서 더 평안하시고 더 즐거워지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라고 먹먹함을 드러냈다.

 

모델 출신 배우 배정남은 인스타그램에 “이순재 선생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너무나도 존경하는 선생님과 드라마를 함께할 수 있어서 제 인생 최고의 영광이었습니다, 편히 쉬세요. 선생님”이라는 글을 남겼다. 그는 지난해 이순재 주연의 KBS 2TV 드라마 ‘개소리’에서 목소리 연기를 맡았다. 

 

또한 그는 “선생님께서 남기신 작품과 메시지는 대한민국의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기억될 것”이라며 “모든 세대의 사랑을 받은 예술인이자 국민배우였던 선생님을 오래도록 기억하겠다. 선생님의 표정과 목소리가 여전히 선명하다. 부디 평안히 쉬시길 바란다”고 추모했다. 가수 태연도 과거 연극 ‘앙리 할아버지와 나’에 이순재와 출연했던 인연을 전하며 추모했다. 

 

KBS는 고인의 유작 ‘개소리’와 ‘드라마시티 십분간, 당신의 사소한’을 특별 편성한다. 25일 오후 10시 45분에는 지난해 방송된 이순재의 유작 ‘개소리’가 1~4회까지 특별 편성된다. 이순재는 이 작품으로 생애 최초이자 마지막 연기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26일 오후 11시 10분에는 지난 2006년 방송돼 호평을 얻었던 KBS 2TV ‘드라마시티-십분간, 당신의 사소한’을 편성, 시청자들을 찾는다.

 

한편, 고인의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27일 오전 6시 20분 엄수되며, 장지는 이천 에덴낙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