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의료대란의 원인이 됐던 정부의 의대 정원 2000명 일괄 증원 추진은 합리적 추산과 데이터에 기반하지 않은 채 “연 1000명 이상은 늘려야 한다”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서 비롯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증원 규모가 2000명으로 정해진 데는 이관섭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파악됐다. 정부는 ‘의사를 많이 늘렸으면 좋겠다’는 대통령실의 ‘막연한’ 희망 사항을 충족하기 위해 증원 규모 결정부터 대학별 정원 배정에 이르기까지 주먹구구식 대응으로 일관한 것으로 나타났다.
◆단계적 증원안 번번이 ‘퇴짜’
27일 감사원이 공개한 ‘의대정원 증원 추진 과정에 대한 감사’ 결과에 따르면 보건복지부는 대통령실에 단계적 증원안을 수차례 보고했지만, 윤 전 대통령 등은 번번이 퇴짜를 놓았다. 당초 복지부의 안은 6년(2025∼2030년) 동안 연 500명씩 총 3000명을 늘리는 방식이었다. 2023년 6월 조규홍 전 복지부 장관으로부터 이를 보고받은 윤 전 대통령은 증원 규모를 더 늘리라고 주문했다. 복지부는 4년에 걸쳐 5000명을 증원하는 별도 안을 같은 해 10월 재보고했다. 3년(2025∼2027년)에 걸쳐 연 1000명, 2028년엔 2000명을 증원하는 안이었다. 윤 전 대통령은 “충분히 더 늘려야 한다”며 이마저도 퇴짜를 놓았다.
감사원은 “복지부는 2035년이라는 미래 시점을 전망하면서 고령화와 저출생 요인을 간과했다”며 “고령화는 의사를 더욱 부족하게 하는 요인이고, 저출생은 반대임을 고려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아서 의사 부족 규모가 부정확하게 산출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와중에 이 전 실장은 ‘워라밸’(일·여가 균형)을 고려한 의사 부족 예측치를 다시 뽑아보라고 복지부에 요청했다. 그랬더니 오히려 부족한 의사 규모가 5800여명으로 급격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워라밸 예측치’는 정책에 반영되지 않았다.
◆정작 의대 현장점검은 안 해
정부는 2000명 일괄 증원을 추진하면서도 정작 학생들을 감당해야 하는 전국 의대들의 여건은 제대로 살피지 않았다. 대통령실과 복지부 중심의 증원 논의 과정에 배제됐던 교육부는 뒤늦게 각 의대의 학생 수용 역량을 고려해 배정 인원을 결정하기 위해 배정위원회를 구성했다. 배정위원들은 보건의료정책을 연구하는 교수·연구위원, 각 부처 및 기초단체 공무원들이었다. 의대 증원 규모를 정하기 위한 위원회를 꾸리고선 정작 의대 교육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겪고 있지 않은 이들을 채워 넣은 것이다.
배정위는 의대들의 학생 수용 능력을 파악하기 위한 현장점검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지만 교육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복지부가 작성한 보고서를 활용하면 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복지부는 배정위원들에게 보고서도 제공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한편 복지부는 “감사원 감사 결과를 향후 업무에 적극 반영하겠다”며 “감사원에서 통보한 분석 결과는 의료인력 수급과 관련해 수급추계위원회에서 참고자료로 활용할 예정”이라고 했다. 복지부는 “의대 정원 결정이 합리적이고 과학적 근거에 기반해 보정심 등에서 충분한 숙의를 거쳐 결정되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