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에서 널리 불리는 이 찬송가의 작사자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사사오 데쓰사부로.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의 신학자로서 그는 사후 출간된 『아가강의』(1924)를 통해 식민지 조선에 신부 영성의 씨앗을 뿌린 인물이다.
아가서를 강의할 때 그는 이렇게 외쳤다.
주님과 깊은 교통을 나누고, 밀실에서 주와 교류하며, 성결의 향기를 발하는 삶. 어린 양 혼인잔치의 신부를 지금부터 맛보라는 것이었다.
서양의 신부 영성은 어떻게 태평양을 건너 한반도에까지 이르게 되었을까? 이번 회에서는 미국의 대각성운동에서 시작해 일본과 한국으로 이어진 영적 물줄기를 따라가 본다.
◆신령과 진리, 두 물결이 만나기까지
19세기 미국 제3차 대각성운동은 두 갈래의 흐름을 만들었다. 하나는 무디로 대표되는 복음주의 부흥운동, 다른 하나는 웨슬리안 전통을 계승한 성결운동(Holiness Movement)이다.
복음주의 부흥운동은 성경의 권위와 개인적 회심을 강조하며 장로교·감리교·침례교 등 교파를 초월한 영적 각성 운동을 견인했다. 반면 성결운동은 ‘완전한 성화’를 주장하면서, 중생 이후에도 성령의 충만함을 통해 신자가 더 높은 영적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이 두 흐름은 서로 다른 경로로 동아시아에 도달한다. 복음주의는 장로교·감리교 선교사들을 통해, 성결운동은 동양선교회를 통해 각각 일본과 조선으로 유입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두 물줄기가 한반도에서 합류했다는 사실이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은 장로교 선교사들이 주도했지만, 그 내부의 영적 분위기는 성결운동 특유의 회개, 성령 체험, 거룩한 삶의 추구를 강하게 품고 있었다.
◆동양선교회, ‘신부 교회’를 세우다
1901년 도쿄에서 동양선교회가 창립되었다. 무디성서학원 출신 카우만 부부와 길보른, 일본인 나카다 주지, 그리고 사사오 데쓰사부로가 주축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분명했다. 재림 준비를 위해 세계 곳곳에 “그리스도의 신부된 성결교회를 세우는 것.”
사사오의 영성 형성 과정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는 1888년 미국 유학 중 대각성운동의 현장을 체험하고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귀국 후에는 영국 캠브리지 출신의 성결운동가 벅스톤에게 4년 동안 사사받았다. 벅스톤은 생전에 아가서를 주제로 깊이 강해했으며, 그의 사후 제자들이 그것을 정리해 『아가영해(雅歌靈解)』라는 책으로 엮어 냈다.
1905년 사사오는 도쿄성서학원 원장이 되었고, 그곳에서 배운 한국인 중 한 명이 이명직이다. 이명직은 1916년 경성성서학원 교수가 되어 성서를 가르쳤다. 두 사람은 아가서에 심혈을 기울였다. 1924년 일본에서 사사오의 아가강의가 유고집으로 출간되었고, 1926년 경성에서 이명직의 아가서강의가 출간되었다. 무디성서학원에서 도쿄성서학원으로, 다시 경성성서학원으로. 기독교 2천년 신부의 영성이 ‘아가서 강의’를 통해 한국 교회에 전해졌다.
◆중세에서 근대로, 귀용의 유산
그렇다면 벅스톤의 신부 영성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17세기 프랑스의 여성 신비가 마담 귀용을 만나게 된다.
귀용(Jeanne Guyon, 1648~1717)은 아가서 주해서를 썼다는 이유로 바스티유 감옥에 갇힌 인물이다. 그녀는 아가서를 신랑(그리스도)과 신부(영혼)의 사랑과 합일에 대한 여정으로 해석하며, 영혼이 영적 혼인을 통해 하나님과 ‘본질적 합일(essential union)’에 들어간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해석은 로마 가톨릭 당국에 의해 정적주의(Quietism)로 단죄되었다.
그러나 귀용의 영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가 강조한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 태도’는 세기를 건너 웨슬리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었고, 19세기 출판된 그녀의 전기를 통해 다시 조명받았다. 이 불씨는 성결운동가들의 마음을 붙들었고, 1875년 영국에서 시작된 케직(Keswick) 운동으로 이어지며 개신교 전반에 ‘더 높은 영적 삶’(Higher Life)의 메시지를 퍼뜨렸다.
귀용의 영성이 이토록 지속력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의 사상이 이미 깊고도 넓은 영성신학의 전통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귀용은 프란치스코 드 살, 토마스 아 켐피스 등 경건 고전을 탐독하며 자신의 영적 기반을 다졌다.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요한으로 이어지는 중세 신비주의 계보가 자리한다. 특히 베르나르가 18년에 걸쳐 집필한 『아가서 설교』는 서구 영성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으로 꼽히며, 귀용은 이 계보의 한가운데서 후대 영성 운동에 깊은 영감을 전한 인물이었다.
벅스톤은 바로 이 케직 전통 안에서 사사오를 훈련시켰다. 이렇게 중세 유럽에서 움튼 신부 영성이 영국을 거쳐 일본으로, 다시 한반도로 흘러들어오는 놀라운 길이 열린 것이다. 사사오가 벅스톤에게서 배운 것은 단순한 성경 해석이 아니라, 2천 년 기독교 영성을 관통하는 신부 영성의 맥이었다.
◆정통과 이단의 경계에서
사사오와 이명직의 아가서 해석은 ‘경건주의적 관점’에 속한다. 그들은 신부를 ‘완전한 성결에 이른 참된 교회’로 보았다. 이는 신부를 보편 교회로 이해하는 교회론적 관점과 신부를 개인 영혼으로 이해하는 신부신비주의적 관점 사이에 놓여 있는 해석이다.
이명직은 이렇게 썼다. “그 유형적 교회가 다 신부가 아니며 그 다수한 교파가 다 신부는 아니니라.” 모든 교회가 아니라 성령이 충만한 ‘신령한 교회’만이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는 제도 교회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 신앙에 머무르는 것에 대한 엄중한 경고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건주의적 해석에는 신부신비주의로 기울 수 있는 가능성도 숨어 있었다. 사사오는 아가서 1장 2절을 주석하며 ‘주를 갖고 싶음’, ‘주와 애정을 통함’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교회 공동체를 강조하면서도, 개인이 그리스도와 직접 사랑으로 결합하는 영적 체험을 여전히 열어둔 것이다.
마침내 서양의 신부 영성은 바다를 건너 한반도에 도착했다. 12세기 베르나르에서 시작해 아빌라의 테레사, 귀용, 웨슬리, 케직 운동, 벅스톤, 사사오, 이명직으로 이어지는 긴 여정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양순석 역사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