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역사를 읽으면서 늘 아쉬웠던 게 광개토대왕 부분이었다. 한국사에서 가장 넓은 영역을 확보하며 고구려 전성기의 기틀을 닦은 영웅 군주라는 것이 광개토대왕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다. 실제로 중국 지안시 퉁거우에 서 있는, 높이 6m를 훌쩍 넘는 경이로운 광개토대왕비를 마주하면 그가 경영했던 제국의 규모를 짐작하게 된다. 그런데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비롯해 어디를 보아도, 그가 어떻게 그 대제국을 경영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런데 세종 때 편찬된 ‘치평요람’을 읽다 뜻밖의 구절을 발견했다. “고구려는 신의가 없으니(無信), 처음 친해도 나중엔 변할까(爲變) 두렵다”는 위나라 장수 양민(楊?)의 말이다. 연왕 풍홍이 사대를 거부하고 “고구려와 연합하겠다”고 하자, 양민은 고구려를 믿지 말라며 그처럼 말했다. ‘고구려는 믿을 수 없는 나라’라는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는 이 표현이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이끈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대외정책 기조를 압축적으로 드러낸다고 본다. 실제로 뒤의 일이긴 하지만, 장수왕은 망명해 온 연왕 풍홍을 죽이고 사로잡은 포로들을 송나라로 호송했다. 이러한 대외정책에 대해 구대열 교수는 ‘삼국통일의 정치학’에서 “한국사 2000년을 통틀어 주변 정세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국가이익을 극대화한 가장 위대한 사례”라고 평가했다. 의리가 아니라 국익을 우선한 실용 외교가 고구려를 강대국으로 비약시킨 것이다.
또 하나의 궁금증은 광개토대왕의 남방정책이다. 왜 그는 백제와의 전투에 그토록 집요했을까. 고구려는 문화·위협 구조상 대륙 지향적이었지만, 그는 즉위 6년 만에 396년 백제를 공격해 58성 700여촌을 탈취했고, 399년 신라와 동맹을 맺었으며, 400년엔 5만 대군으로 백제·가야·왜 연합군을 격파했다. 이에 대해 어떤 이들은 ‘복수설’을 얘기한다. 곧 371년 평양성 전투에서 백제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한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한을 풀기 위한 남방 진출이었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나는 경기 지역의 비옥한 농경지와 서해 해상권을 확보하려는 고국원왕의 구상을 계승했다는 윤명철 교수의 해석이 더 설득력 있다고 본다. 윤 교수는 ‘광개토태왕과 한고려의 꿈’에서 광개토대왕 때 고구려가 정복과 외교로 국제질서를 주도하는 해륙(海陸)국가로 자리 잡았다고 보았다.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