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남정훈 기자] 지난달 19일 IBK기업은행의 홈구장인 화성종합체육관. 이날 IBK기업은행은 도로공사와의 홈 경기에서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0-3 셧아웃 패배를 당하며 6연패의 늪에 빠졌다. 이후 22일 현대건설전(0-3 패)을 마치고 사퇴 의사를 밝혔던 김호철 전 IBK기업은행 감독이 지휘봉을 내려놓기로 마음을 굳힌 것도 도로공사전 패배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바로 그날, IBK기업은행의 ‘최리’(최고의 리베로) 임명옥(39)도 펑펑 울었다. 체육관에서도 화장실에 혼자 들어가 오열했고, 숙소를 옮겨서도 울음이 멈추질 않아 계속 울었다. 리베로 포지션 특성상 본인이 아무리 잘해도 직접 득점을 올릴 순 없다. 팀 승리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게다가 처절한 패배감를 안겨준 상대가 ‘친정팀’ 도로공사였다는 점이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은 베테랑에게 더 큰 아픔을 안겼으리라. 그래서 더 서럽게 울었을지도 모른다.
최고참의 서럽게 흘리는 눈물이 IBK기업은행 선수단을 깨웠을지도 모른다. “제가 우는 모습을 직접 보진 못했어도 그 소리를 후배들은 다 들었죠. 그게 뭔가 후배들에게도 각성할 수 있는 계기가 돼지 않았을까요?”
정말로 그랬나보다. 그로부터 아직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임명옥은 미소를 되찾았다. 김호철 전 감독이 사퇴하고 여오현 감독대행 체제를 맞이한 후, IBK기업은행은 거짓말처럼 연승 행진을 달리고 있다. 모두가 처음엔 ‘상대팀을 잘 만나서겠지’라고 넘겼지만, 이젠 웃어넘길 수 없는 수준이다. 10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2025~2026 V리그 여자부 3라운드 GS칼텍스와의 원정 경기에서도 세트 스코어 3-0 완승을 거뒀다.
선수단 면면이 달라진 건 하나도 없다. 여 감독대행은 확고부동한 주전 라인업을 짰다. 김 전 감독 시절엔 아웃사이드 히터 두 자리를 놓고 킨켈라(호주)-육서영-황민경을 상황에 따라 바꿔 기용했다면, 여 대행은 킨켈라의 포지션을 옮겼다. 여 대행은 “킨켈라가 대학 시절엔 아포짓에서 뛰던 선수다. 그래서 킨켈라를 아포짓으로 옮기고 육서영과 빅토리아(우크라이나)를 아웃사이드 히터에서 뛰게 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리시브에 방점이 찍히는 아웃사이드 히터 자원인 황민경은 후위 세 자리 소화롤을 부여했다.
좌 빅토리아-육서영, 우 킨켈라를 동시 가동하는 이 라인업은 수비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여 대행이 이 포메이션을 과감하게 가동할 수 있는 원동력은 딱 하나, IBK기업은행이 보유한 현역 최고의 리베로 임명옥의 존재 덕분이다. 마치 조조군의 백만대군에 홀몸으로 장판파에서 대항한 장비마냥, IBK기업은행의 수비를 책임지는 임명옥의 존재 덕분에 IBK기업은행의 경기력은 몰라보게 끈끈해졌다.
킨켈라를 아포짓, 빅토리아를 아웃사이드 히터로 이동시킨 덕에 블로킹에서도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이날 GS칼텍스의 주포 지젤 실바(쿠바)는 1m91의 장신인 빅토리아를 상대해야 했고, 평소의 공격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물론 김지원에게서 실바로 향하는 토스의 질이 떨어진 것도 있다) 7개 구단 전체가 외국인 주포를 아포짓으로 쓰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아웃사이드 히터로 뛰는 빅토리아와 맞물려 돌아가면 높은 블로킹벽을 뚫어야 하는 부담을 안고 뛰어야 한다.
킨켈라도 이날 수치상으론 블로킹 1개, 서브득점 1개 포함 5점(공격 성공률 21.43%)에 그쳤지만, 코트 위에서의 움직임이 시즌 초반보단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게다가 킨켈라가 전위에서 1m91의 장신으로 블로킹 벽을 세우면 코트 후방에 있는 임명옥이 코스를 지키기가 훨씬 수월해지는 효과도 있다.
GS칼텍스전 승리 후 임명옥은 최정민과 함께 수훈선수로 인터뷰실에 들어섰다. 임명옥은 “연패를 하는 동안에도 언젠간 치고 올라갈 수 있을 거라고, 계속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을 했어요. 이젠 연패를 끊고 저희가 생각했던 배구를 하고 있어서 다행이에요. 오늘 걱정을 했는데, 이겨서 너무 기분 좋아요”라고 소감을 밝혔다.
GS칼텍스의 실바는 IBK기업은행과의 1라운드 맞대결 때 승리하긴 했지만, 자신의 공격을 집요하게 받아올린 임명옥의 미친 수비력과 나이(1986년생)를 듣고 놀라워했던 적이 있다. 이에 대해 묻자 “그래서 그런지 2라운드 땐 실바가 페인트를 많이 하더라고요. 오늘도 그 대비를 한 게 잘 먹혔다”면서 “실바가 제 나이를 듣고 놀랬단 얘기를 듣고 저도 저를 판단하기에 좀 동안이라고 생각하긴 하거든요. 20대까진 아니고 30대 초반? 그정도로는 보이지 않나요?”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여 대행이 현재 가동하고 있는 포메이션은 임명옥에게 수비 부감이 가중되는 전술이다. 그러나 ‘최리’답게 부담보다는 고마움이 더 크다. 임명옥은 “저를 믿고 그렇게 포메이션을 짜주신거니까. 범실을 하더라도 내가 하자라고 생각하면서 하고 있어요. 물론 아직도 제가 어디를 커버를 먼저 해야할지 고민을 하고 있고, 그 고민 때문에 범실을 하고 있긴 하지만 ‘아, 먹었어’ 실망하지 않고 다음걸 하자라는 마음으로 하고 있어요”라고 설명했다.
여 대행이 한국 남자배구 리베로의 G.O.A.T(Greatest Of All Time)라면 임명옥 역시 한국 여자배구 리베로의 G.O.A.T다. 리베로 G.O.A.T가 사제로 만났지만, 여전히 지적받고 있다고. 임명옥은 “네. 아직 지적 많이 받고 있어요. ‘이단 연결 좀 늦춰서 줘라’, ‘명옥아, 웃어’ 등등 많아요. 여 대행께서 그냥 보고 있다가 점수 먹는 걸 진짜 싫어하세요. 그리고 무조건 웃으라고 하셔서 잘 따르고 있어요”라고 답했다.
임명옥의 역할은 리베로에서 그치지 않는다. 팀 전체의 공격이나 후배들에 대한 조언까지. 사실상 ‘플레잉코치’로 뛰고 있다. 올 시즌 들어 IBK기업은행의 주요 공격옵션으로 자리잡은 미들 블로커 최정민의 ‘중뻥’(개인시간차성 오픈)의 빈도가 늘어난 것도 임명옥의 조언 덕분이었다. 임명옥은 “IBK에 오고나서 (최)정민이에게서 도로공사의 (배)유나의 모습이 보이더라고요. 유나가 ‘앞차’를 많이 한것처럼 정민이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세터들한테도 ‘빅토리아나 아웃사이드 히터들에게 너무 어렵게 주지말고 이단 연결 때 주아나 정민이한테도 앞차 많이 올려라’라고 조언했죠. 그게 먹힌거죠”라고 설명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임명옥은 위를 바라보고 있다. “저희가 밑에 있는 동안에 위에 있는 팀들이 얽히고 설키고 해서 올라갈만한 것 같아요. 이제 우리가 여수 KOVO컵 때나 시즌 준비 때 했던 즐거운 배구를 하고 있어요. 아직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니 더 올라가보려고요”
IBK기업은행의 다음 경기는 14일 김천 도로공사 원정이다. 친정팀과의 1,2라운드 맞대결에서 모두 패했고, 2라운드 패배 후엔 너무나 많은 눈물을 흘렸기에 임명옥으로선 제대로 벼르고 김천으로 내려간다.
필승 비책도 있다. 임명옥은 “제가 작년에 도로공사에 있을 때 상대팀들이 저희를 이기려면 ‘(강)소휘를 화나게 하면 된다’라고 했다더라고요. 올해는 모마(카메룬)만 화나게 만들면 되는 것 같아요. 빅토리아가 그 앞에서 블로킹벽을 세우고 제가 뒤에서 받아올리면서 화를 내게 만들면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요즘 좀 화를 내고 있는 것 같던데...”라면서 도발성 멘트를 날렸다.
도로공사전을 이기고 싶은 이유 하나 더. 임명옥이 도로공사에서 IBK기업은행으로 이적해 오면서 그 자리는 문정원이 물려받았다. 도로공사 시절 최강의 리시브 듀오로 활약했던 임명옥과 문정원이 이제는 리그 최고 리베로를 두고 다투는 상황이다. 리시브 효율에선 문정원(47.39%), 임명옥(42.02%)로 1,2위를 달리고 있고, 디그에선 임명옥(세트당 5.878개), 문정원(세트당 5.776개)로 1,3위에 랭크되어 있다. 수비도 임명옥(세트당 7.490개), 문정원(6.944새)로 1,3위다. 6년 연속 베스트7 리베로 부문을 석권한 임명옥에겐 강력한 도전자가 나타난 셈이다. “올해도 시작하기 전에 7년 연속 베스트7을 받고 싶은 게 목표였거든요. 못 받아도 말씀드릴 수 없는 개인적인 목표를 이루면 돼요. 물론 베스트7도 양보하고 싶진 않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