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이맘때, 우리 가족은 미국 중부의 작은 도시에 살고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이던 아이는 서툰 영어에도 친구들과 잘 어울렸다. 어느 날, 학교에 다녀온 아이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저 탤런트쇼 나가게 됐어요.”
김희원 국제부 기자
미국 초등학교의 장기자랑이었다. 아이는 K팝 댄스를 추겠다고 했다. 잠시 머물다 가는 학교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알리겠다는 패기가 대견했다.
그날부터 연습에 돌입했다. 혹시 실수해 놀림당하지 않을까, 친구들의 수준을 보고 주눅 들지 않을까 걱정돼 자꾸 참견했다. “방금 한 박자 빨랐어. 팔을 쭉쭉 뻗어야지.”
참가자 가족이 탤런트쇼에 초대됐다. 떨리는 마음으로 아이를 응원하러 갔다. 콩트, 체조, 무용, 악기, 무술, 노래 등 아이들의 장기는 다채로웠다. 발레복을 입은 한 아이가 무대에 서니 객석이 웅성거렸다. 기대가 일었다. 음악이 시작되자 아이는 한 손으로 봉을 잡고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했다. 기초 동작만 한참을 보여주던 아이는 음악이 멈추자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객석에서는 박수가 터졌다. ‘이게 끝인가?’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린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클라리넷을 연주한 고학년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음이 5개를 넘지 않는 기본적인 곡이었다. 아이는 밝게 인사했고 또 박수가 쏟아졌다. 피아노도, 체조도, 뮤지컬도. 무대에 오른 아이들 대부분이 비슷했다.
순서가 진행될수록 나는 얼굴이 더워졌다. 내가 이 아이들에게 무엇을 기대한 것인가. 아이들은 배우는 중이고, 그 과정을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있는데. 내가 우리 아이에게 품었던 걱정, 다른 아이들에게 가졌던 기대, 그리고 나도 모르게 스쳤던 실망까지 모든 게 부끄러워졌다.
한국에서 남들에게 내놓을 만한 정도라 함은 으레 ‘일정 수준 이상 완성된 결과’를 뜻한다. 그에 미치지 못하면 부족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우리 기준의 부족함을 그곳 사람들은 ‘배우는 과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태도는 학교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깔려 있다.
미국에서 내가 “영어를 잘 못해요”라고 말할 때마다 상대는 “배우는 중이군요”라고 답했다. 놀랍게도 그 말 한마디에 당당한 마음이 솟았다. ‘그래, 나는 배우는 중이니까 못하는 게 당연해.’ 부족함과 배우는 중의 차이는 단순히 말의 다름이 아닌 자존감으로 이어지는 문제였다.
최근 지인에게서 들은 소식은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 동네 학생이 성적을 비관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 심지어 작년에도 두 학생이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무엇이 그 어린아이들을 벼랑으로 몰았을까. 우울한 생각의 끝에 나는 미국 초등학교 장기자랑에서 느꼈던 부러움을 떠올렸다. 서툶과 미완을 가능성으로 받아들이고, 그 과정을 모두가 응원하면서 아이들의 마음을 단단히 세워주는 사회.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이 바로 그런 태도임을 새삼 절감했다.
다시 우리 아이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그날 무대에서 K팝 종주국의 위상을 제대로 떨쳤다. 공연 이후 학교에서 모르는 친구들도 다가와 하이파이브를 건넸다고 한다. 그 무대에서 얻은 용기와 자신감을 지켜줄 어른이 되는 것이 나의 몫이라고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