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반도체 투자 명분… 금산분리 43년 만에 사실상 완화 [지주사 지분 규제 특례]

기재부 “첨단산업 투자 촉진책”

지방 투자·공정위 승인 조건 달아
대규모 설비 투자금 확보에 숨통
지주사 금융리스업 예외적 허용도
‘손자회사’ SK하이닉스 최대 수혜

“재벌 중심 기업구조 부작용 우려”
“특정기업 맞춤 규제 완화” 비판도

기획재정부 업무보고에서 공개된 지주사 규제특례를 두고 정부가 인공지능(AI)과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사실상 ‘금산분리’(금융과 산업의 분리) 완화에 나섰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한민국 산업과 금융을 규제해 온 금산분리의 대원칙이 ‘미래먹거리’ 앞에 43년 만에 변곡점을 맞이했다.

 

11일 정부가 첨단산업 투자 활성화를 위해 팔을 걷어붙인 것은 국가 간 대항전의 성격이 짙어진 기술경쟁 시장에서 대규모 투자를 통한 선점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큰 틀에서 금산분리 원칙에 손대지 않았지만 사실상 예외를 두고 증손회사를 통한 금융리스업을 할 수 있는 제도적 길을 터줬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금융리스업 허가까지… 금산분리 완화 평가

 

정부가 지주회사의 지분 규제 완화와 금융리스업을 할 수 있는 제도 완화를 함께 추진한다는 점에서 이번 지주사 규제 특례는 사실상 금산분리 완화로 읽힌다.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공정거래법)은 금융지주회사가 금융업이나 보험업을 하지 않는 국내 회사의 주식을 소유하는 것과 일반지주회사가 금융업 혹은 보험업을 영위하는 국내 회사의 주식을 보유하는 것을 금지하는 금산분리 원칙을 두고 있다. 하지만 이번 정부의 결정으로 반도체 등 대규모 설비 투자가 필수적인 업종에 대해서는 지주회사가 리스(대여) 형태의 금융업을 통해 계열사에 설비를 공급할 수 있도록 길이 열리게 됐다.

 

정부 발표대로 규제가 완화되면 SK의 손자회사인 SK하이닉스가 자회사(SK의 증손회사)를 설립할 수 있는 요건이 완화되고 SK하이닉스는 투자금 확보에 활로가 열릴 것으로 보인다. SK하이닉스가 손자회사를 만드는데 필요한 자금이 지금보다 50%로 줄게된다.

 

이에 일각에선 SK하이닉스 등 일부 반도체 기업을 위한 맞춤형 규제 완화라는 비판도 나온다. 최대수혜자로 평가받는 SK그룹의 최태원 회장은 “단일 기업이 천문학적인 투자를 감당하기 어려운 만큼 외부자금을 유연하게 유치할 수 있게 해달라”며 규제 재검토 필요성을 재차 강조해 왔다. 또 지주회사 체제에서 손자회사 구조로 반도체 사업을 영위하는 대기업은 SK를 제외하곤 없는 상황이다.

지난달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 마련된 ‘SK 인공지능(AI) 서밋 2025’ 전시장에 SK하이닉스의 고대역폭메모리 HBM3E가 전시된 모습. 연합뉴스

◆외환위기에 강화된 금산분리 원칙 ‘흔들’

 

금산분리는 금융과 산업의 결합에 따른 금융 고객과 산업자본 간 이해 상충 가능성, 경제력 및 금융의 집중화, 금융회사의 건전성 훼손 가능성 등의 문제점을 방지하기 위해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이 상대 업종을 소유?지배하는 것을 금지하는 원칙이다. 삼성·SK·현대자동차 등 산업자본이 은행이나 자산운용사 등 금융회사를 경영하지 못하도록 하고, 거꾸로 금융자본이 산업자본을 소유 및 지배하는 것도 금지한다.

 

우리나라에선 1982년 동일인의 의결권 있는 은행 주식 8%(현재 10%) 초과 소유 및 사실상의 지배를 금지한 은행법 개정을 통해 금산분리가 제도화됐다. 이후 공정거래법과 ‘금융지주회사법’, ‘보험업법’, ‘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에서 금산분리 관련 규제를 구체화하고 있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재벌과 금융기관 간 불투명한 거래 구조, 계열사 간 자금 지원이 외환위기의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금산분리에 대한 관심과 목소리가 높아졌고 금산분리 원칙이 강화됐다. 정부가 이날 규제특례 대상으로 지목한 지주회사의 증손회사 지분 의무화 규정도 1999년 지주회사 설립이 허용되면서 생겨났다. 현행법상 금융지주회사는 일반 회사의 주식을 20% 이상 보유할 수 없고, 금융 사업에 주력하지 않는 산업자본은 의결권 있는 은행 주식을 4%(지방은행은 15%) 이상 보유할 수 없다.

 

정부는 금산분리 규제 완화라는 비판을 의식하듯 지방투자와의 연계를 조건부로 걸었다. 구윤철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기본적으로 지방투자를 우선하도록 했다”며 “만약 수도권에 관련 생태계를 조성하는 경우 지방에 투자하는 조건을 붙일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공정거래위원회의 심사와 승인도 거치도록 했다.

◆“미래 위한 개선” vs “재벌 부작용” 엇갈려

 

예외적인 금산분리 완화에 대해 합리적인 제도 개선이라는 평가와 함께 금산분리의 취지에 비춰 반대하는 의견도 적지 않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미국이나 중국 등에서는 대규모 투·융자가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는 많이 지체돼 있는 상황이다. 합리적인 제도 개선이자 매우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평가했다. 양준모 연세대 교수(경제학)는 “금산분리가 완화되면 산업 자본으로 은행 자본금 확충이 가능해 안정성을 높일 수 있어 꼭 필요하다”며 “펀드의 경우도 금융권 사람들뿐 아니라 업태를 잘 아는 산업분야 전문가들이 뛰어들 수 있어 자본 효율성이 좋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양준석 카톨릭대 교수(경제학)는 “한국은 기업집단 내 경영이 밀착된 ‘재벌’이 있어 금산분리를 추진할 경우 다른 국가에 비해 더 큰 부작용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고, 안동현 서울대 교수(경제학부)는 “정부가 규제를 풀어주더라도 ‘규제 차익’을 노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기업들이 제도를 악용하는 행태를 보인다면 그때 다시 규제를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기재부는 전략 산업이 민간·정책자금을 설비 확대 등의 재원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장기임대로 초기 투자 부담을 줄여주는 방안도 보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