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세 배우 박정민은 요즘 뱅골 호랑이 ‘리차드 파커’와 망망대해에서 227일을 표류한 열일곱살 인도 소년 파이 연기로 열일 중이다. 본업인 배우 휴업을 선언한 지 1년여만이자 무대 복귀는 2017년 문근영과 함께한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이후 8년 만이다. 18일 공연에 앞서 기자들과 만난 박정민은 오랜만의 연극 출연에 대해 “간간이 제안은 있었지만 무대가 겁이 났다. ‘내가 잘하지 못한다’는 판단이 들어 조심스럽게 거절해왔다”고 말했다. 연극 출연이 부담스러웠다지만 그의 무대 복귀작 ‘라이프 오브 파이’에 대한 평단과 관객 반응은 “깊은 몰입감이 느껴진다”는 대호평이다. 박정민은 “(8년간)연기 기술이 엄청 늘었다기보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가짐이 바뀐 것 같다. 그동안 느끼고 좌절하고 다짐해온 과정들이 ‘굳은살’이 돼서 지금은 예전보다 무대를 조금 더 견딜 만하고, 조금 더 재미있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화·드라마에서 활약하다 연극에 출연하는 배우들이 보통 관객을 직접 만나는 무대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희열을 강조하는데 박정민은 달랐다. 큰 용기가 필요한 엄청난 도전이었고 관객 시선은 두렵다고 한다.
“좋기도 하지만 정말 무섭습니다. 관객이 뭔가 진지한 표정, 제가 해석할 수 없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데 그 눈과 마주치면 순간 몰입이 깨져서 다시 붙잡고 가야 하더라고요. 제가 초심자라는 거겠죠. 스크린 없이 직접 연기를 본다는 건 배우와 관객 모두에게 흥분되고 흥미로운 일이면서도 동시에 서로 긴장하는 일 같아요. 그래서 ‘좋다·나쁘다’로 단정하기보다, 굉장히 흥미로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는 ‘라이프 오브 파이’를 하면서 많은 것을 배운다고 말했다. “영화는 그날 찍고 오케이가 나면 그 장면을 ‘다시’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런데 공연은 5~6개월 동안 같은 장면을 거의 매일 만드는 작업이에요. 그 과정에서 연기로 공부가 많이 되고, 상대 배우들과도 빠르게 돈독해져요. 결국 ‘한 장면을 6개월 동안 더 좋은 장면으로 만들기 위해 계속 머리를 싸맨다’는 부분은 배우로서는 해볼 만하고 많이 배울 수 있는 작업이라고 느꼈습니다.”
120분에 달하는 파이 이야기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그는 육식을 하지 않던 파이가 굶지 않기 위해 바다 거북이를 잡아먹는 장면을 꼽았다. 관객으로서도 강렬하게 인식되는 장면인데 박정민은 “파이라는 인물이 본격적으로 확 들어간다고 느낀다. 신념과 생존 사이에서 생존을 선택한 어린 종교인의 혼란부터 작품이 몰아치기 시작하고, 그 혼란은 누구나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지점이라 더 크게 다가왔다”고 말했다.
연기 상대로 호랑이를 만난 경험에 대해선 자신도 퍼펫티어(인형술사) 중 한 명이 된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제가 ‘도와줘야’ 호랑이가 살아있는 느낌이 나더라고요. 연습 초반 약 한 달 반은 감정보다도 신체 훈련에 가까웠어요. 호랑이와 안전하게 호흡을 맞추고 교류하는 방식을 반복해서 훈련하다 보니, 어느 순간 제가 퍼펫티어 중 한 명이 된 느낌도 들었습니다.”
후배이지만 연기경험이 많은 또 다른 파이 박강현으로부터 많이 배우고 있다는 박정민은 둘의 차이점에 대해 멘탈 강·약으로 설명했다. 자신의 파이는 멘탈이 약하고 감성적인데 박강현의 파이는 멘탈이 강하고 자기 이야기를 더 당당하게 한다는 것. 박정민은 “동선이나 말하는 방식, 이 장면에서 어떻게 움직이는 게 맞는지 등을 계속 상의했다. 그런데 성향이 다르다 보니 함께 만들었는데도 어느 순간 ‘완전히 다른 파이’가 나오더라. 누가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다른 인물이 탄생하는 게 신기했다”고 말했다.
파이와 자신은 실제로는 닮은 점이 전혀 없다고 선을 그은 박정민은 ‘삶’을 향한 의지를 강조했다.
“이 공연을 하면서 ‘삶’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믿음, 희망 같은 키워드는 결국 더 나은 삶을 위해 취해야 하는 태도인데 그건 고정돼 있지 않고 늘 변하더라고요. 파이는 살아야 하므로 ‘첫 번째 이야기’를 믿는다고 생각해요. 더 나은 삶을 위해 어른들에게도 ‘이 이야기가 더 낫지 않으냐’고 계속 되묻는 거죠. 저에겐 삶을 지탱하는 키워드가 변할 수 있어도 ‘그럼에도 살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로 다가왔습니다.”
서울 GS아트센터에서 3월 2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