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기의호모커뮤니쿠스] ‘필리버스터’ 수난

대한민국 국회는 정기국회의 마지막 날인 9일에도 막말, 고성, 조롱, 야유의 난장판을 재연했다. 야당 의원의 필리버스터를 13분 만에 국회의장이 마이크를 끄는 조치를 했기 때문이다. 발언이 의제와 관련 없다는 자의적 판단에 따른 해프닝이었다. 대한민국 15대 대통령이 되는 김대중 의원이 1964년 4월 20일 임시 국회에서 필리버스터를 중지당한 이후 61년 만의 일이다. ‘말’과 ‘토론’을 통해 나랏일을 하는 국회에서 필리버스터의 수난은 예사롭지 않다.

필리버스터(Filibuster)는 의회의 다수파가 통과시키려는 법안 표결을 늦추거나 막기 위해 소수파가 토론을 장시간 지속하는 의사진행 전략이다. 다수당의 입법 폭주 견제, 소수당 의견 보호, 대의민주주의의 존중이라는 장점과 시급한 민생 법안의 처리 지연, 의사진행의 마비라는 단점을 함께 지닌다. 필리버스터가 법률안 제정을 바꾸는 구속력이 없다는 점에서 다수파의 의회 운영 독주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는 정치적 행위로 보기도 한다.



우리 국회의 필리버스터 제도는 1973년 폐지되었다가 2012년 국회선진화법 도입을 통해 부활했고, 주로 법안 처리를 지연시키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19대 국회(2012~2016), 20대(2016~2020), 21대(2020~2024)에서 1~2회 사용되던 필리버스터가 현 22대 국회에 들어와서는 지금까지 누적 횟수를 능가할 만큼 급증하고 있다. 우리 국회에서 필리버스터는 법에 따라 24시간 이내에 종료된다.

입법 효율성을 위해 필리버스터를 폐지하자는 주장에 대해 전문가들은 효율성은 민주주의의 최고 가치가 아니며, 오히려 단순 다수결보다 필리버스터가 다수의 힘을 절제시키고 견제·균형·숙의라는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를 지키는 영혼 같은 것이라고 설명한다(‘Defending the filibuster: The soul of the Senate’, Arenberg & Dove). 국회는 ‘말’에 대해 면책특권을 부여받는 유일한 공간이다. 더욱이 이번 국회의 법사위와 과방위에서는 야당 의원의 말에 대해 여당 위원장의 경고, 간섭, 마이크 끄기 등 발언 개입이 상시화하고 퇴장 명령도 발동된다.

합법적인 절차 내에서 행사하는 국회의원의 ‘말’을 보호하지 않고 ‘말’을 추방하는 조치는 국회답지 않은 일이다. 국회는 “모든 형태의 의견은 진리를 포함할 수 있고, 서로 다른 주장이나 논쟁은 한쪽이 일방 진리이고 다른 쪽은 일방 거짓이기보다는 서로의 주장 사이에 일정 수준의 진리를 공유할 수 있다(‘On liberty’, Mill)는 말을 실행하는 곳이어야 한다.

김정기 한양대 명예교수·언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