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올해의 한자로 ‘熊’ 선정 일반인 응모 통해 세태 반영 교수들이 뽑는 韓 사자성어 통찰력 있지만 거리감 느껴
올해도 어김없이 연말이 찾아왔다. 누군가를 만나면 의례히 “한 해 마무리 잘 하시라”는 인사를 건네게 된다. 끝나가는 1년을 되돌아보며 새로운 1년의 시작을 준비하는 시기다.
한 해를 사회적으로 반추하는 행위가 ‘올해의 단어’ 선정일 테다. 언어 생활에서 한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대단히 큰 일본에서는 1995년부터 ‘올해의 한자’를 뽑고 있다.
유태영 도쿄특파원
지난 12일 교토 기요미즈데라(·水寺)에서 모리 세이한 주지 스님이 가로 1.3m, 세로 1.5m 크기 종이에 휘호를 통해 발표한 2025년의 한자는 구마, 즉 ‘곰 웅’(熊) 자였다. 도심 진출이 더욱 활발해져 역대 최다 인명 피해(사망 13명 포함 230명)를 낸 곰이 올해 일본의 화두였음을 보여준다.
모리 스님은 “환경이 바뀌어 우리 몸 주위로 그것(곰)이 다가오는 것을 실감했다”며 “희생자의 명복을 빌며, 내년에는 좋은 글자가 선정되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기하라 미노루 관방장관은 “국민의 불안이나 관심 고조를 반영한다고 생각한다”며 “곰 피해 대책 로드맵을 올해 안에 마무리해 봄 포획을 계획적으로 실시하는 등 계속 긴장감을 갖고 대응하겠다”고 했다.
일본 올해의 한자는 일반인 응모로 선정된다. “올해 1년을 상징하는 한자 한 글자를 응모해 주세요. 가는 해, 오는 해, 전하는 한 글자.” 지난달 말 주일 한국대사관 근처 도서관에 들렀다가 우연히 본 응모함에 적힌 문구다. 이렇게 모인 18만9122개의 한자 가운데 곰 웅 자가 2만3346개였다.
‘쌀 미’(米) 자는 180표 부족해 2위로 밀렸다. 현 나루히토 일왕 연호를 따 ‘레이와의 쌀 소동’이라는 말까지 나온 쌀값 고공행진, 국난 수준의 위기감을 안겨준 미국의 관세 폭격 등을 떠올리게 한다. 일본은 쌀 미 자를 써서 미국을 적는다.
다음은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총리와 고물가 현상을 가리키는 ‘높을 고’(高), 오사카·간사이 만국박람회(엑스포)의 ‘일만 만’(万·萬)과 ‘넓을 박’(博), 엑스포 캐릭터 먀쿠먀쿠를 나타내는 ‘줄기 맥’(脈), 일본 최초의 여성 총리 탄생을 염두에 둔 듯한 ‘여자 녀’(女) 등이었다. 일본이 어떤 1년을 보냈는지 얼추 되짚어볼 수 있다.
26년 만에 바뀐 연립정권, 인공지능(AI) 진화에 따른 변화 등을 보여주는 6위 ‘바뀔 변’(··變)에서는 한국과 접점이 발견된다. 올해 한국 사회를 상징하는 사자성어로 꼽힌 ‘변동불거(變動不居)’와 글자와 뜻이 겹친다. 변동불거는 ‘세상이 잠시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가면서 변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급격한 변화와 불확실성, 지속 가능성에 대한 고민 등이 묻어난다.
올해의 사자성어는 교수신문에서 추천, 예비심사, 전국 교수 설문조사 세 단계를 거쳐 선정한다. 학자들의 집단지성이 반영된 만큼 통찰력이 있고 시대정신을 꿰뚫는다. 지난해엔 ‘도량발호(跳梁跋扈·권력이나 세력을 제멋대로 부리며 함부로 날뛰는 행동이 만연하다)’가 뽑혔는데, 설문 종료 하루 뒤 일어난 12·3 비상계엄 사태를 예견한 듯해 소름이 돋기도 했다.
대신 매우 낯설다. 주역에 나온다는 변동불거, 장자에 등장한다는 도량발호를 접해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나마 변동불거는 중학교용 기초한자 900자에 포함된, 비교적 쉬운 한자들로 이뤄져 있어 의미를 유추해 볼 수는 있다.
얼마 전 교육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김언종 한국고전번역원장이 “학생들이 대통령 성함에 쓰이는 ‘있을 재’(在), ‘밝을 명’(明)도 잘 모른다”며 한자 교육 강화를 건의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그래서 ‘죄명’이라고 쓰는 사람이 있지 않나”라고 받아쳐 화제가 됐다.
이 대통령은 “(기초한자)1800자만 배워도, 아니 천자문만 배워도 대개의 단어가 가진 깊은 의미를 쉽게 이해하고 사고 능력을 키울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자를 익히면 같은 한자 문화권인 중국, 일본 국민과 소통, 교류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
당장 한자 교육을 강화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그렇다면 한자를 멀고 어렵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문화부터 바꿔 나가는 건 어떤가. 올해의 사자성어가 변동불거의 예외가 될 수는 없을 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