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넘는 표류 끝에 ‘경쟁입찰’…KDDX는 왜 이 선택밖에 없었나 [박수찬의 軍]

1년 6개월 이상 표류하며 숱한 논란을 초래한 한국형 차기 구축함(KDDX) 사업 방식이 지명경쟁입찰로 22일 결정됐다.

 

방위사업청은 이날 열린 방위사업추진위원회에서 KDDX 상세설계 및 선도함 건조를 맡을 사업자 선정 방식으로 수의계약·경쟁입찰·공동설계 방안을 논의해 만장일치로 경쟁입찰을 의결했다고 밝혔다.

 

HD현대중공업이 제안하는 한국형 차기구축함(KDDX) 모형. 세계일보 자료사진

지난 2월 산업통상부가 KDDX 건조 방산업체로 지정한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 중 경쟁에서 승리한 업체가 상세설계 및 선도함 건조를 맡는다.

 

방위사업청 관계자는 “경쟁으로 공정성을 담보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겠다는 의견들이 많아 경쟁입찰로 최종 결정됐다”고 설명했다.

 

사업자 선정 방식 결정이 지연되면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의 각축전은 내년부터 다시 불붙게 됐다. 국내 조선업계가 뜨겁게 달아오를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대목이다.

 

◆경쟁입찰 외엔 다른 방법 없었다

 

방위사업청의 지명경쟁방식 채택은 예견된 것이었다. 군 당국이 선택할 수 있었던 방법은 업체 간 경쟁 또는 보류였다.

 

사업 일정이 늦어진 상황에서 결정을 미루는 것은 더 큰 후폭풍을 초래할 수 있었다. 사업자 선정 방식을 연내 결정해야 했고, 남은 것은 경쟁입찰뿐이었다.

 

한국 해군 중·장기 전력 현대화의 핵심인 KDDX는 세종대왕·정조대왕급 이지스 구축함보다 작지만 국내 기술로 다기능레이더와 전투체계, 음파탐지기 등의 핵심 장비를 개발, 건조하는 첫 국산 구축함 사업이다.

 

HD현대중공업이 제안하는 한국형 차기구축함(KDDX) 상상도. HD현대중공업 제공

7조8000억원을 투입해 6000t급 KDDX 6척을 건조할 예정이다.

 

군함 건조 사업 중 최대 규모가 될 KDDX를 놓고 국내 조선업계를 대표하는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은 오랜 기간 치열한 각축전을 벌여왔다.

 

함정 건조는 개념설계→기본설계→상세설계 및 선도함 건조→시험평가→후속함 건조의 절차를 거친다. 한화오션과 HD현대중공업이 각각 개념설계(2012∼2013)와 기본설계(2020∼2023)를 맡았다.

 

2023년 12월 기본설계 완료 후 방위사업청은 기존 방식대로 기본설계를 맡았던 HD현대중공업과 수의계약을 통해 상세설계 및 선도함 건조를 하려고 했으나 경쟁이 과열되면서 사업이 지연됐다.

 

방위사업청은 여러 차례 방위사업기획관리분과위원회를 개최해서 사업자 선정방식을 논의했지만, 업체와 정부, 민간위원 입장이 계속 엇갈리며 결정이 이뤄지지 못했다.

 

한화오션은 KDDX 개념설계와 관련한 HD현대중공업의 군사기밀 유출사건을 지적하며 경쟁입찰 또는 공동설계를 주장했고, HD현대중공업은 수의계약을 주장해왔다.

 

이재명정부 출범을 전후로 정부와 업계에선 KDDX 사업자 선정 방식으로 수의계약·경쟁입찰·공동설계가 거론됐다.

 

지난 5월 28일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 제1전시장에서 열린 국제해양방위산업전(MADEX)에서 참가자들이 HD현대중공업 부스를 찾아 최신형 호위함 등을 살펴보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5일 충남 천안 타운홀미팅에서 방위사업청에 “군사기밀을 빼돌려서 처벌받은 곳에 수의계약을 주느니 (하는)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던데 그런 것 잘 체크하라”고 주문했다. 이를 두고 KDDX를 둘러싼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의 대립을 지목한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이 대통령 발언 직후 HD현대중공업이 주장했던 수의계약, HD현대중공업이 수의계약을 하되 한화오션이 일부 공동 참여를 보장하는 방안 등은 동력을 잃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공동설계도 가능성은 낮았다. 공동설계를 하려면 양사 간 신뢰가 필수다. 과열 경쟁으로 양사 관계가 개와 고양이 관계 수준으로 악화된 상태에선 신뢰 구축이 쉽지 않다.

 

양사의 설계 시스템은 호환이 되지 않는다. 별도 건물에서 보안 및 설계 관련 시스템을 구축하고 인력을 모으는 등의 작업도 필요하다.

 

업무 분담 범위에 대한 양측간 협상도 필수다. 관급 장비 조달까지 고려하면 방위사업청·해군·HD현대중공업·한화오션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면서 조율을 해야 한다. 

 

지난 52023년 6월 7일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에서 열린 국제해양방위산업전(MADEX)에서 한화시스템 부스에 전시된 해양전투체계. 세계일보 자료사진

공동설계를 하면 1년 이상의 시간이 더 소요될 것이란 관측이 나왔던 이유다. 공동설계도 넓게 보면 수의계약의 형태에 속한다는 것도 걸림돌로 작용했다.

 

결국 방위사업청은 남은 옵션인 지명경쟁입찰 방식으로 KDDX 상세설계 사업자를 결정하게 됐다. 하지만 1년 6개월 이상 사업이 지연된 것에 대한 비판은 피하기 어렵다.

 

방위사업청은 올해 초에 2026년도 예산안을 편성할 때, 9월 KDDX 사업자 선정절차 개시를 전제로 했다. 하지만 관련 절차 개시는 내년으로 미뤄지게 됐다. 정책 조정을 통해 신속한 의사결정을 내렸어야 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방위사업청이 방산수출보다 한국군이 유사시 싸워서 이기는 데 필요한 장비를 제때 공급하는 것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해군 요구도 충족이 결정적 변수 

 

방위사업청은 상세설계 및 선도함 건조 기본계획을 작성해 내년 1분기쯤 방위사업추진위원회에 상정할 예정이다.

 

방위사업추진위원회를 통과하면 제안요청서 작성→입찰공고→제안서 평가→협상→실행계획 확정→계약에 이르는 절차가 순차적으로 진행된다.

 

지난 5월 28일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 제1전시장에서 열린 국제해양방위산업전(MADEX)에서 참가자들이 HD현대중공업 부스를 찾아 최신형 호위함 등을 살펴보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입찰공고 시점은 4∼5월쯤이 될 전망이다. 입찰공고 후 제안서 접수까진 40일, 유찰 시 재공고를 감안하면 50일 정도의 시간이 주어질 것으로 보인다.

 

제안서 평가·협상에 두 달 안팎의 시간이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계약 시점은 내년 말이 될 예정이다. 유찰이 지속되어 법령상 수의계약 요건이 충족되면, 계약 시점이 예상보다 당겨지거나 늦어질 수도 있다.

 

경쟁입찰로 사업자가 선정될 상황이 확정되면,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 간에는 치열한 눈치 싸움이 벌어질 전망이다. 한화오션 측은 제안서 준비를 위해 경남 거제사업장 인력을 서울로 부르는 등의 조치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한화오션이 주장한 경쟁입찰 방식이 받아들여진 모양새지만, 실제 결과는 장담하기 어렵다는 관측이 많다.

 

KDDX 경쟁입찰 승자는 해군 요구도를 얼마나 충실하게 반영하는가에 따라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 국외 구매 사업이 아니므로 절충교역 등의 요소는 적용되지 않는다.

 

한국 해군 이지스구축함 서애 류성룡함이 항해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가격은 평가과정에서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고, 1·2등 간 평가 점수 차이도 1점 미만이 될 것으로 알려졌다.

 

가격을 대폭 낮춰 저가로 수주를 일단 해놓고, 건조 과정에서 추가 비용을 요구하는 것을 차단하려는 조치로 보인다.

 

결국 해군 요구도를 얼마나 충실하게 실현하느냐가 핵심인 셈이다.

 

HD현대중공업은 KDDX 기본설계를 담당했다. 그만큼 해군의 요구를 파악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HD현대중공업은 KDDX보다 대형함인 1만t급 세종대왕·정조대왕급 이지스 구축함 6척 중 5척을 건조한 실적도 갖추고 있다. 한화오션은 세종대왕급 1척(율곡이이함)을 만든 경험이 있다.

 

KDDX가 ‘미니 이지스함’이라는 별명답게 이지스함처럼 탄도미사일 탐지·추적과 방공 등의 임무를 복합적으로 수행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지스구축함 건조 경험 관련 요소가 제안서 평가 등에서 고려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 해군 기동훈련에 참가한 이지스구축함 정조대왕함(맨앞)과 율곡이이함(앞에서 두번째)이 다른 함정들과 함께 항해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한화오션은 대우조선해양 시절인 2002∼2006년에 5500t급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 3척을 건조한 경험이 있고, 울산급 배치-Ⅲ(충남급) 호위함 2척, 울산급 배치-Ⅳ 호위함 2척 건조를 수주했다.

 

하지만 KDDX는 탄도미사일 탐지·추적과 통합방공체계 구축 등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이나 울산급 배치-Ⅲ·Ⅳ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의 첨단 기술이 대거 반영된다. 다양한 하드웨어·소프트웨어 통합도 요구된다.

 

평가과정에서 최근에 구축함을 만든 경험이 중시될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대목이다.

 

지난해 4월 24일 경남 창원시 해군사관학교에서 열린 이순신방위산업전(YIDEX)에서 참석자들이 한화오션 부스에서 한국형 차기 구축함(KDDX) 개념설계 모형과 울산급 배치-III 호위함, 장보고-III 배치-II 잠수함 등을 둘러보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제안서 평가 과정에서 양측의 점수 차가 크지 않을 경우 군사기밀 유출 사건으로 HD현대중공업이 받은 보안감점이 변수가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HD현대중공업은 2020년 9월 소속 직원이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이 만든 KDDX 개념설계 자료 등의  빼내 유죄 판결을 여럿 받은 것과 관련해 1.8점 보안감점을 받았다.

 

이는 11월 18일 이후 소멸됐다. 하지만 방위사업청은 재판별로 차이가 있다고 보고 2026년 12월 6일까지 1.2점의 벌점을 적용할 것이라고 지난 9월에 밝힌 바 있다. 당시 HD현대중공업은 강하게 반발하며 법적 조치 가능성도 언급했다.

 

경쟁입찰 결과에서 양측간 점수 차가 2점 이내로 좁혀진다면, 벌점이 변수가 될 수 있다. 방위사업청 내 검토를 거쳐 실제 적용 여부가 결정될 예정인데,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소리 없는 싸움이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한국 해군 호위함 충남함이 실사격 훈련을 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방위사업청은 KDDX 선도함을 2032년 말 해군에 인도할 계획이다. 2030년 말~2031년쯤에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경쟁입찰방식으로 사업자를 선정하면서 추가로 지연되는 상황이다.

 

KDDX 상세설계와 선도함 건조를 담당하는 업체는 향후에 있을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 대체함과 연안초계함 등의 수상함 사업 수주 경쟁에서도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누가 KDDX 상세설계를 수주할 것인지를 놓고 업계의 높은 관심이 지속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