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김부장과 김지영, 젠더 갈등

각자 자리서 시대의 무게 감당
그 속에서 서로에게 모진 현실
모든 선택은 스스로를 위한 것
서로에 대한 이해와 인정 필요

“2025년 최고의 호러물”.

올해 방영돼 큰 화제가 됐던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김부장)에 대해 많은 직장인이 내놓은 평이다. 극한의 효율을 강요하는 무한 경쟁, ‘라인’에 따라 생사가 갈리는 적자생존의 정글, 대한민국의 회사 풍경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보여준 드라마는 드물었다. ‘김부장’식 하이퍼리얼리즘은 사이코패스가 등장하는 스릴러나 유혈이 낭자한 고어, 유령이 등장하는 심령물보다 직장인의 간담을 더 서늘하게 했다. “연말 인사에서 우리 회사도 ‘김부장’처럼 좌천자들을 줄줄이 안전관리 담당으로 보냈다”는, 바로 주변에서 벌어지는 잔혹극이기 때문이다.

정진수 문화체육부장

그래서 김부장에 대한 연민이 컸다. 주변인을 경계하며 명품 가방 하나, ‘서울 자가’에 자부심을 뽐내는 얄미운 캐릭터였지만 그의 성실함도, 살아남기 위한 절박함도 모두 조직에서 손쉽게 소모됐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내 안의 속물근성’과 동시에 ‘언젠가의 나’를 봤다.



가정에서 그의 이름은 가장이다. “내가 다 알아서 하겠다”는 말은 그저 허풍이 아니라 가장이라는 무게에서 나오는 마지막 자존심이다. 회사가 요구하는 흔들림 없는 단단함, 가정이 기대하는 묵묵한 존재감, 이것이 그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다.

그의 옆에는 ‘경단녀’ 박하진이 있다. 가족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하고, 나이가 들어서도 단아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며, 말 안 듣는 부자(父子)에게 화도 내지만 한없는 사랑으로 감싸안고, 무엇보다 ‘허술한’ 가장을 끝까지 믿는다. 회사에서 남편의 위상이 끝없이 흔들려도, 사기까지 당해도 그는 기꺼이 남편과 가족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더 고민한다.

그런데 이 얘기, 어딘가 익숙하다. ‘다양한 인격’이 드러나는 부분만 다를 뿐, ‘82년생 김지영’의 다른 모습이다. 어린 시절부터 남아선호 사상과 사회적 기대 속에서 여성으로서의 역할을 내면화한 김지영은 직장을 다녔지만 결혼 후 출산과 육아로 인해 전업주부가 되면서 결국 경력단절을 경험한다. 김지영의 삶은 한 개인의 인생사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억압에 눌린 여성 전체의 삶이 집약되었기에, 김지영은 어느 순간 ‘페미니즘’의 상징이 됐다.

‘가장’ 김부장과 ‘페미니스트’ 김지영은 사실 같은 세대다. 김지영의 남편 정대현(공유 분)은 지금쯤 어느 기업의 부장일 수 있고, 김부장의 아내 박하진의 모습은 김지영이 정신과 진료로 고통을 이겨낸 다음일 수 있다. 김부장의 한숨과 김지영의 침묵은 서로 다른 문장처럼 들리지만, 사실 같은 구조적 압력에서 나온 숨막힘이다. 다만 김부장과 김지영은 서로를 힘들게 만들지 않았다. 이들을 압박한 것은 언제나 시대였다. 김부장은 구조 안에서 갈려 나가고 김지영은 구조 밖으로 밀려난 것만이 차이였다.

드라마 속 배우자와 가족은 서로를 향한 듬직한 응원군이 돼줬지만 현실에서는 젠더·세대 갈등이 첨예하다. 남성과 여성, 어른과 청년, 부모와 자녀, 우리 모두는 각자의 자리에서 시대가 맡긴 무게를 감당해 왔지만, 시대의 무게가 무거워질수록 사람들은 ‘섀도복싱’을 하듯 성별과 세대로 나뉘어서 각자의 아픔만 강조하고, 서로를 향한 비난의 화살을 날렸다. 드라마 속 김지영과 김부장에 공감하면서, 바로 옆 현실 속 김부장과 김지영에는 모질었던 셈이다.

지영 엄마는 지영에게 “너 하고픈 거 해”라고 말한다. 김부장은 후배에게 “(결혼도 출산도) 나 좋자고 한 것”이라고 답한다. 우리 인생의 선택은 모두 나를 위한 선택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모두는 이해와 위로와 격려를 받고 싶어 한다. “나보다 네가 더 힘드냐”는 비교우위를 위한 갈등은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인정이다. 그 마음은 시대를 견디는 힘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김부장·김지영, 그에 더해 세상 모든 ‘미생’의 장그래들에게 말하고 싶다. 2025년을 버텨낸 당신의 하루하루는 무엇보다 값진 기록이었다. 2026년, 당신의 성실함이 끝내 소모되지 않고 하루의 끝에서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온기로 되돌아오기를, 그리고 그 온기가 오래 머물러 서로의 삶을 조금 덜 날카롭게 대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