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데이터 전문가인 다음소프트 출신 송길영 작가는 인공지능(AI) 시대, 기업의 경쟁 환경을 이렇게 규정했다. 시대 흐름을 읽고 신속하게 움직이는 조직만 살아남는다는 것으로, 덩치 큰 기업일수록 의사결정과 실행력이 떨어질 수 있어 이제는 ‘이름값=생존’ 등식이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투자 결정을 한 뒤 전사적으로 뛰는 미국 빅테크(거대기술기업)들만 봐도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현미 산업부 차장
PC가 떠오르던 시절, 기업 이름에 ‘제국’이란 칭호를 얻었던 인텔은 모바일 부흥 시기에 실기(失期)하며 이제는 미국 정부의 보조금을 받는 대신 지분 일부를 내주는 처지가 됐다. 그래픽처리장치(GPU)로 세계를 제패한 엔비디아로 그 영광이 옮겨졌으나 요즘 엔비디아도 구글의 텐서처리장치(TPU) 위협에 맞서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지난 수백 년간 혁신 기술 시장에선 극소수의 승자가 사실상 시장을 독점했다. 1980년대 후반 철도를 시작으로 전기, 자동차, 정보기술(IT) 분야에 이어 이제는 AI 쪽이 그 무대가 됐다.
AI 버블 논란에도 기업들이 투자를 멈출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한다. 지금 투자를 멈추는 건 도태와 낙오, 패배로 귀결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마이크로소프트(MS), 아마존, 알파벳 등 미국 주요 빅테크가 밝힌 내년 투자 규모는 1000억달러(약 146조3100억원)에 이른다.
그 덕에 실적 성장이 예정된 곳 중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이 포함된 건 자랑스러운 일이다. 최첨단 유망 산업에 선제적으로 투자해 그 공급망의 핵심 축으로 자리한 기업인들의 혜안과 결단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현재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반도체 산업은 미국의 특허와 설계, 동아시아의 생산이라는 분업 구조로 돌아간다. 원래는 메모리칩 개발부터 생산까지 미국 기업이 다 했지만, 1950∼1960년대 반도체 기업 창업주들은 미국인의 높은 인건비와 근로조건 등으로 생산성이 떨어지자 해외 외주 생산을 결정하며 기술을 이전했다. 그때 국가의 명운을 걸고 유치한 곳이 지금의 TSMC를 키운 대만이었다. 한국도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결단에 힘입어 반도체 공장을 세웠다.
미 실리콘밸리에 있다가 대만 정부의 제안으로 TSMC를 설립한 모리스 창은 “미국에서는 새벽 1시에 뭔가 고장 나면 다음 날 아침에서야 엔지니어가 수리를 시작하지만 대만에선 새벽 2시에 수리가 완료된다”고 회고하며 대만인의 열정에 감탄한 바 있다.
지금 세계는 최첨단 시장에서 속도의 경쟁을 벌이고 있다. 중국은 반도체 공급망을 좌지우지하는 미국 견제에 맞서 반도체 설계, 제조에 이어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 시제품까지 스스로 생산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우리는 어떤가. 산업계 한 관계자가 토로하는 한국의 현실을 보면 의미심장하다.
“미국에 공장을 둔 한 대기업에 여러 국적의 직원들이 있는데 주 52시간제 적용을 받는 한국인들만 오후 5시에 퇴근을 한다고 해요. 외국인 직원들이 보면 연구개발(R&D)에 매진해도 모자랄 판에 이해가 안 되는 모습인 거죠.”
모든 현장에 일괄 적용된 주 52시간 노동 규제 때문에 벌어진 풍경으로 ‘눈물의 퇴근’이란 말까지 나온다. 반도체 업계는 고소득·전문직 근로자에 한해 ‘한국형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제도를 도입해달라고 호소해왔지만 정부·여당은 요지부동이다. 대마필사가 가능해진 시대, 우리 스스로 미래 산업에 족쇄를 채우고 있다는 비판을 게을리 들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