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정부 들어 쟁점법안들이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거쳐 통과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집권여당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 등 범여권이 180석이 넘는 의석수를 바탕으로 국민의힘이 진행하는 필리버스터를 하루 만에 종료한 뒤 통과시키면서다.
토론을 통한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라는 필리버스터 본연의 취지가 범여권의 압도적 의석수 앞에서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 의석수 변동이 없는 만큼 내년에도 ‘필리버스터 정국’은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민주당은 24일 국민의힘이 신청한 필리버스터를 중단시키고 ‘허위조작정보근절법’으로 불리는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가결했다. 필리버스터 신청과 종료만 올해 15차례다. 모두가 하루 만에 끝났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서 확인할 수 있는 최근 본회의 가결 법률은 필리버스터가 진행된 법안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필리버스터 시작, 하루 뒤 종료투표, 법안 통과라는 절차가 반복되면서 ‘1일 1법안’이 계속됐다는 뜻이다. 지난 12∼14일 처리된 형사소송법·은행법·경찰관 직무집행법 개정안 등도 같은 절차를 거쳤다. 윤석열정부에서는 25차례의 거부권이 국회의 새 풍경이었다면, 이재명정부에서는 필리버스터, 그리고 ‘1일 1법안’이 국회의 새 풍경이 된 셈이다.
민주당 및 조국혁신당 등 범여권이 의석수 우위를 앞세워 자당 주력 법안 등을 처리하고, 막을 방도가 없는 국민의힘은 필리버스터를 신청하지만 24시간 동안 본회의 통과를 지연시키는 이상을 못한다. 이러다 보니 정부조직법 개정안이나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방미통위) 설치법 등 민주당 주도 법안 대다수가 사실상 법안 수정이나 여야 합의 없이 국회에서 가결됐다.
필리버스터 국면이 장기화하면서 본회의 사회 이슈까지 여야 간 갈등재료로 부상했다. 필리버스터 도중엔 국회 의장단이 사회를 봐야 하는데 국민의힘 소속 주호영 국회부의장이 사회를 거부, 우원식 국회의장과 이학영 국회부의장의 부담이 커지면서다.
우 의장은 이날 본회의 산회 선포에 앞서 “앞으로 이런 식의 무제한 토론은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우 의장은 주 부의장을 겨냥해 “자신의 정당에서 제출한 무제한 토론임에도 자신의 정치 소신에 맞지 않는다고 아예 사회를 보지 않겠다고 한다”며 “의장과 다른 한 분(이 부의장)의 체력에만 의존하는 방식으로는 무제한 토론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양 교섭단체 대표께서 방안을 내놓기 바란다”고 촉구했다.
우 의장은 전날에도 주 부의장에게 사회를 요청하면서 거절 시 정회 가능성까지 내비쳤지만, 주 부의장은 끝까지 사회를 보지 않았다. 주 부의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만약 우 의장이 민주당이 일방적으로 올린 법안에 ‘야당과 합의되지 않아 상정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여야 원내지도부를 불러 협상을 진행했더라면 오늘의 필리버스터는 없었을 것”이라면서 “사회 거부는 국회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부의장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저항”이라고 주장했다.
이러자 민주당은 다음 본회의에서 필리버스터 요건을 강화하는 내용의 국회법 개정안 처리를 검토하기로 했다. 재적 의원 5분의 1인 60명 이상이 출석하지 않으면 국회의장이 회의 중지를 선포할 수 있고, 의장이 지정하는 의원이 필리버스터 사회를 볼 수 있도록 한 것이 핵심이다. 민주당은 재적 기준을 완화하더라도 사회권 확대는 포함해야 한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의힘은 법안 처리를 막겠다고 했다. 곽규택 원내수석대변인은 “국회의장 본인의 편의를 위해 절차를 흔드는 행위”라며 “협박에 가까운 권한 행사”라고 했다. 국민의힘은 민주당이 내년에 처리하기로 한 법왜곡죄, 대법관 증원 등 사법개혁안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수사 권한 확대법도 모두 반대한다. 여야 합의가 어려운 탓에 새해에도 필리버스터 정국은 지속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