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허호빈, 예수님의 한을 품다 [역사와 신학에서 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 기고]

1944년 여름, 평양. 김성도가 세상을 떠난 지 석 달이 흘렀다. 허호빈과 남편 이일덕은 ‘새주님’의 영정 앞에서 밤낮으로 경배하며 기도하고 있었다. 그들의 기도는 탄식에 가까웠다. “새주님을 통해 에덴동산이 회복될 줄 알았는데….” “우리가 아직 깊이 들어가지 못한 것 같습니다.” 부부의 결의는 급진적이었다. 그들은 부부관계를 끊고 철저한 금욕의 길로 들어섰다. 

 

어느 날 새벽, 허호빈은 자신의 몸에서 미묘한 변화를 느꼈다. 배 속에서 미세한 움직임이 일어났고, 그 순간 또렷한 음성이 들려왔다.

 

“어머니” 

허호빈은 몸을 떨며 엎드렸다. “감히 제가 어떻게…” “그렇다면 무엇이라 부르면 좋겠느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허호빈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부부의 입장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그날 이후 예수는 ‘선생님’, 허호빈은 ‘사모님’이 되었다. 1940년대 평양에서, 한 여인은 스스로를 예수의 아내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아기 예수 숭배’. 안토니오 다 코레조 作.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낳았으나 강보조차 준비하지 못했다. 허호빈은 예수가 평생 입을 옷을 지극 정성으로 마련했다.

◆마리아가 준비하지 못한 강보

 

허호빈은 예수와의 대화를 이어갔다. 성서에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그녀의 체험 속에서 펼쳐졌다.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날 때, 마리아는 강보조차 준비하지 않았다. 모자로 내 몸을 감쌌다.” 그 음성에는 서러움이 배어 있었다. “의붓아버지 요셉은 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가난과 멸시 속에서 자랐다.” 마리아는 예수를 낳았으나, 그를 메시아로 섬기지 못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어머니조차 그의 메시아적 길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예수는 홀로 십자가를 향해 걸어갔고, ‘어린 양의 혼인잔치’는 역사 속에서 미완으로 남았다. 

 

허호빈은 흐느꼈다. “제가 주님의 한을 풀어드리겠습니다.” 이 고백은 한국적 정서 위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한’을 품고 살아온 민족, 죽은 자의 원을 풀기 위해 저승까지 내려가는 바리공주의 서사, 억울한 영혼을 위무하는 무속의 해원 의례. 허호빈은 예수의 한을 풀어야 할 존재로 스스로를 인식했다. 중세의 메히틸트가 “나는 그를 먹고 마신다”고 노래했다면, 허호빈은 예수를 자신의 복중에 모셨다. 상상임신에 가까운 체험이었고, 실제로 배가 불러왔다.

 

기이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서구 기독교의 여성 신비가들 역시 유사한 체험을 했다. 시에나의 카타리나는 극단적 금식 끝에 성체만으로 살아간다고 했고, 아빌라의 테레사는 엑스터시 속에서 신랑 예수와 결합했다. 현대 의학은 이를 병리적으로 해석하지만, 그들에게는 신앙적 체험이다. 허호빈의 복중 체험은 서구의 신부 영성과 한국의 해원 정서가 결합된, 독특한 한국적 신부신비주의다.

 

◆마리아가 하지 못한 일을 하다

 

허호빈의 정체성은 분명했다. 그녀는 더 이상 남편의 아내가 아니라, 오직 예수의 아내였다. 이일덕은 이를 받아들였고, 부부는 완전한 금욕으로 들어갔다. 300~400명의 신도가 그녀를 따랐다. 허호빈은 전 재산을 처분했다. 처음에는 기저귀에서부터 예수가 평생 사흘마다 갈아입을 옷까지, 모두 양복과 한복으로 지었다. 마리아가 모시지 못했던 것을 대신 하겠다는 결단이었다. “이제 재림주님과 신부가 입으실 옷을 준비해야 합니다.” 신심 깊은 여인들이 모였다. 명주를 열두 번 빨고 열두 번 다듬었다. 세 땀씩 꿰매고, 머리카락을 한 올씩 뽑아 실과 섞어 조끼를 떴다. 정결을 유지하기 위해 옷을 다 짓기 전에는 화장실도 가지 않았다. 쌀은 열두 번 씻어 맷돌로 직접 갈아 떡을 만들었다. 경배는 하루 300배로 시작했다. 700배, 3,000배, 마침내 7,000배로 늘어났다. 

 

이는 기독교 신부 영성의 전형이다. 오리게네스의 극단적 금욕, 힐데가르트의 동정 서원처럼, 허호빈 역시 자신의 육체를 완전히 그리스도 안에 녹이려 했다. 다만 그 방식은 한국적이었다. 강신과 해원이라는 토착적 감각 속에서, 2천 년 신부 영성은 실체적 준비로 구현되었다.

 

◆“나는 예수의 신부입니다” 

 

1946년 8월, 평양 대동보안서 내무서원들이 복중교를 급습했다. 허호빈과 지도자들은 체포되었고, 정성껏 준비한 옷은 모두 압수되었다. 혐의는 ‘종교를 빙자한 사기’. 

 

보안원이 책상을 내리쳤다. “어떻게 신이 사람의 뱃속에 들어간단 말이오?” 

허호빈은 눈을 감고 배 위에 손을 얹었다. “나는 예수의 신부입니다. 이 복중을 통해 예수님이 탄생하실 것입니다.”

 

4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카타리나가 “그리스도는 나의 신랑”이라 고백했듯, 허호빈 역시 꺾이지 않았다. 그녀는 끝내 출소하지 못했다. 

 

출옥한 신도들은 다시 1년 동안 옷을 만들었다. 흰옷을 입고 매일 감옥 앞을 지켰다. 탄압은 점점 더 거세졌다. 많은 기독교인이 남쪽으로 떠났다. 그러나 복중교 신도들은 평양을 지켰다. “재림주님은 평양에 오신다. 이곳이 에덴궁이 된다.”는 계시를 믿었기 때문이다. 1950년 전쟁 직후, 허호빈은 총살당했다. 마지막까지 그녀의 고백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예수의 신부입니다.”

 

오리게네스는 관념으로 신부를 사유했고, 힐데가르트는 환시로 신랑의 입맞춤을 노래했다. 시에나의 카타리나는 극단적 금식으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다. 허호빈은 예수를 복중에 모셨다. 방식은 달랐지만 목적은 같았다. 예수와의 완전한 합일.

 

허호빈의 신부 영성은 한국적이었다. 강신과 해원, ‘한’을 풀기 위한 자기헌신이 결합된 형태였다. 바리공주가 부모를 살리기 위해 저승까지 내려갔듯, 허호빈은 예수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마리아가 준비하지 못했던 강보를 준비하고, 마리아가 못했던 혼인잔치를 대신 치르려 했다. 섭리의 언어로 말하자면, 허호빈은 마리아가 다하지 못한 책임을 탕감한 존재였다. 감옥에서도, 죽음 앞에서도 꺾이지 않은 고백. “나는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김성도에서 허호빈으로 이어진 신부 영성의 계보. 이 거룩한 정성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일제의 감옥에서, 총살의 순간에도 지켜진 신부의 순결은 누군가에게 승계되어야 했다. 하늘이 2000년 동안 찾아온 신부의 자리는 이제 최종적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양순석 역사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