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얇은소설] 타자를 기억하는 방식

우리는 누군가에게 모두 타자
무심코 건네준 물건·편지·말들
작은 행동 하나로 영향 주게 돼
그 변화 기억하며 서로를 기억

미야모토 데루 ‘토마토 이야기’(‘오천 번의 생사’에 수록, 송태욱 옮김, 바다출판사)

한 해가 저물어간다. 이렇게 문장으로 쓰고 보니 무척 식상한 표현 같은데 다른 문장으로 바꾸고 싶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더 적절한 표현이 없어서이기도 하고, 한 해가 저물어간다는 말은 올해가 며칠 남지 않았다는 어감과는 차이가 있어 보여서인가. 나의 올해 계획은 단편 소설 세 편 쓰기, 였다. 좀 무리라는 걸 알았지만 약속도 많은 12월의 절반을 들어앉아 세 번째 단편을 마쳤다. 소설의 인물 중 도라지를 먹지 못하는 개인적 특징을 부여하고 싶었는데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 생략하고 보니 아쉬움이 남았다. 그렇게 작업실을 서성이다 미야모토 데루의 단편 ‘토마토 이야기’가 떠올랐다.

조경란 소설가

카피라이터 오노데라는 최근에 바뀐 상사로 인해 압박받고 있다. 디자인 회사라 지금까지 자유로웠던 점심시간과 복장에 대해 상사가 엄격히 규제했다. 점심시간은 12시부터 1시까지, 복장은 언제나 양복에 넥타이 차림으로. 식욕도 없어져서 오노데라는 점심은 근처 식당에서 냄비우동을 배달시켜 먹는다. 오늘도 혼자 책상에서 식은 우동을 먹고 있는데 머리도 옷도 늘 검정 일색이라 까마귀라고 부르는 기획제작부 동료와 디자이너 둘이 점심을 먹으며 “학창 시절에 어떤 아르바이트를 경험했는가 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까마귀와 디자이너가 서로의 이야기를 마치곤 오노데라에게 물었다. “뭔가 추억으로 남아 있는 아르바이트 경험이 없느냐고”. 대학교 3학년 때 엄청난 빚을 남기고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고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경험한 오노데라는 그 질문에 시계를 보았다. 1시가 되면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는데 점심시간은 40분 남아 있었다.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 거절했지만 이야기가 듣고 싶어진 동료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의 눈빛처럼 오노데라의 가슴 속에 “반짝반짝” 부풀어 오르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빚쟁이를 피해 어머니와 둘이 오사카 변두리 동네로 이사한 대학생 오노데라는 학생 전용 직업소개소에서 고된 일이어도 시급이 가장 높은 일자리를 얻었다. 막상 가보니 교차로 한가운데 선 채 도로 공사를 하는 현장에서 불도저나 펄펄 끓는 아스팔트를 실은 차량을 교통 정리하는 위험한 일이었다. 밤 8시부터 아침 6시까지. 조금이라도 긴장을 늦추면 인부들에게 큰 사고가 생기는 일. 첫날 그는 노무자 합숙소 옆 식당 한쪽 어두운 방에서 비쩍 마른 중년의 사내가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보리차를 가져다주자 병색이 짙은 사내가 혼잣말을 했다. 토마토가 있으면 좋겠다고.

이튿날 오노데라는 토마토가 든 봉지를 잠든 사내 머리맡에 두고 일을 시작했다. 힘든 일이라 다른 생각할 틈도 없이 며칠이 지났다. 걱정돼 다시 찾아가 보자 사내가 이번엔 편지 한 통을 내밀며 우체통에 넣어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토마토는 하나도 먹지 않았고 시들시들해진 토마토 하나를 가슴에 소중하게 올려두곤 쓰다듬기만 하면서. 주임 말에 따르면 취업 알선자가 데려왔는데, 일하다 쓰러졌어도 날품팔이로 고용돼 산업재해에 적용되지 않아 병원도 못 가고 있다고. 오노데라가 편지를 주머니에 넣고 교차로에서 차량을 통제하는데 구급차가 왔다. 사내는 병원에 도착한 후 사망했고. 오노데라는 눈물을 삼키며 사내의 편지를 찾았다. 수신인 “가와무라 세쓰 님”에게 부쳐주려고.

그 편지가 새로 포장된 아스팔트 길에, “뜨거운 아스팔트 밑에 영원히 갇혀”버리지 않았다면 오노데라는 평소처럼 토마토를 먹게 되었을까? 그러나 그는 그 후 대학을 졸업하고 어른이 돼서도 “사소한 순간”에도 사내가 눈물을 머금고 토마토를 두 손에 꼭 쥐고 있던 모습을 떠올리고는 한다. 토마토를 못 먹는 게 아니라 먹지 않는 것, 그에게는 그것이 변화이며 편지를 부쳐주지 못한, 유품으로 잔고가 86엔인 통장이 전부였던, 거의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보인 한 사람을 기억하는 방식이지 않을까. 몸이 기억하려는 선택적 행위. 이처럼 올해 읽은 소설들은 말한다. 타자가 타자를 변화시킨다고. 그렇다 우리는 누군가에겐 모두 타자이다. 변화의 가능성에 무한히 열려 있는.

 

조경란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