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정치는 역사적으로 분리된 적이 거의 없다. 고대 국가이든, 근대 민주주의 국가이든 인간 공동체를 조직하고 유지한 두 축은 언제나 정치와 종교였다. 정치가 제도를 만들었다면, 종교는 그 제도가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묻는 역할을 해왔다. 긴 역사 속에서 종교 지도자와 정치인의 만남은 예외가 아닌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예수는 “가이사(로마 황제)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라며 국가 권위를 인정하되 신앙 영역 침해는 분명히 경계했다. 붓다는 칠불쇠법(七不衰法)의 가르침을 통해 공동체의 토론과 합의를 강조했고, 무함마드는 통치 자체를 신이 맡긴 책임이라고 여겼다. 이 종교 창시자들 누구도 정치를 외면하지 않았다. 정치는 인간 고통을 줄이거나, 키울 수 있기에 종교가 책임감을 가지고 깊이 관여해야 할 영역으로 인식돼온 것이다.
한국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정치인이 종교인과 소통하고, 종교인이 정치적 의견을 내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역대 대통령과 종교 지도자 만남, 지방자치단체장·국회의원의 종교 행사 참석은 수십 년간 익숙한 풍경이다. 올해 성탄절에도 대통령은 성당을, 여야 지도자는 교회를 찾았다. 전통 보존 명분으로 불교 사찰에 예산이 지원되고 가톨릭 복지시설이 후원되는 일 역시 ‘문화’, ‘복지’라는 이름으로 제도화돼 왔다. 이런 만남과 지원을 두고 ‘정교유착’이라고 비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진다.
왜 유독 통일교와 정치인의 만남만이 ‘정교유착’이라는 낙인으로 재단되고 비난받는가. 문제의 핵심은 단순히 ‘만남’이 아닌, 금품 제공, 대가성, 불법 정치자금 수수와 같은 명백한 위법 행위일뿐이다. 어느 종교든 예외가 없어야 한다.
하지만 금전 거래가 입증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통일교와 정치인의 만남은 먼저 의심의 대상이 된다. 반면 다른 종단의 정책적 배려와 암묵적인 특혜는 ‘관행’ 또는 ‘공익’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이 차이는 법의 영역이 아니라, 깊이 뿌리 박힌 신뢰의 비대칭에서 비롯된다. 제도권에 확고히 자리 잡은 종단은 ‘원래 그래 왔다’는 이유로 설명조차 요구받지 않는 반면, 논란의 대상이 되어온 종교는 같은 행동을 해도 의도를 의심받는 현실이다. 유사한 사진, 유사한 만남이 전혀 다른 의미로 소비되는 것이 우리 사회의 비뚤어진 단면을 보여준다.
종교 창시자들이 공통으로 경계한 것은 ‘관계’ 자체가 아니라 ‘거래’와 ‘종속’이었다. 권력과 손잡는 순간이 아니라, 권력을 이용해 공동선을 훼손하는 순간이 문제였다. 통일교가 느끼는 부당함도 바로 여기에 있다. 평화, 가정의 가치, 공동선 등 의제를 놓고 정치인과 소통하는 행위 자체가 마치 범죄 전조처럼 해석되는 현실은 결코 공정하다고 볼 수 없다. 만약 정치와의 접촉 자체가 문제라면, 모든 종교가 동일한 잣대로 평가받아야 한다. 특정 종교만을 향한 가혹한 도덕적 잣대는 정의가 아니라, 명백한 ‘선택적 편견’일 뿐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례는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김 전 대통령은 현직이던 1999년 세계일보 창간 10주년 행사에 내빈으로 참석했다. 제1야당 총재 시절이던 1989년에도 통일그룹이 주최한 행사에 주빈으로 참석해 문선명·한학자 총재와 공개적으로 인사를 나눴다. 당시 이를 두고 ‘정교유착’이라고 비난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김 전 대통령은 통일교가 오래전부터 주창해 온 한일해저터널 구상에 대해서도 긍정적 견해를 밝혔고, 이는 ‘국가 발전 담론’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경향은 다음 시대에도 이어졌다. 2007년 10월 노무현 전 대통령은 평양 방문 당시 통일교 소유의 평화자동차 공장을 방문해 설명을 듣고 시승하기도 했다. 당시 이 방문은 남북 경제협력의 한 축으로 이해되었을 뿐, 정치적 유착을 운운하는 비난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지금, 통일교 행사 참석이나 유사 인프라 구상 언급만으로 정치인이나 관료들이 무차별 공격을 받는 현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과거 문제 되지 않았던 행위가 오늘날 죄의 증거처럼 소비된다면, 이는 행위의 본질이 변한 것이 아니라 이를 해석하는 정치적 기류가 급격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국가 운영은 제도와 법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사회 갈등을 완화하고, 국가 비전을 제시하며, 공동체적 가치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종교의 도덕적 자산, 국제 네트워크, 장기적 관점은 정치가 대체할 수 없는 역할을 해왔다. 정치가 종교를 사적으로 이용할 때 실질적 문제가 발생할 뿐, 종교가 공공선을 위해 정책 비전과 사회적 담론을 제시하고 정치가 이를 경청하는 것까지 봉쇄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인구 절벽, 공동체 해체, 국제 질서 불안정이라는 위기 속에서 종교와 정치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상호 협력 관계를 형성한다면, 국가는 더 안정되고 국민은 더 큰 위안을 얻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