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정도면 잘 살았다"… 강화 건평항 저녁노을 속에 떠나보내는 2025년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

아쉬운 한해 떠나보내는 강화 낙조 여행/장화리일몰조망지 등 저녁 노을 명소 많아/낙조를 사랑한 어린왕자와 고즈넉한 노을 즐기는 건평항/‘막걸리 시인’ 천상병 해맑은 웃음으로 위로 건네

 

건평항 낙조.

수평선 너머로 서서히 몸을 굽히는 태양. 잔잔한 윤슬 위로 황금빛 길 내어주기 시작하자 하늘은 온통 오렌지 빛으로 타오르며 말없이 어깨를 다독인다. 신나게 즐긴 ‘소풍’ 같은 한 해였노라고. 그러니 미련쯤은 노을에 맡겨도 된다고. 선착장에 몸 기댄 고깃배들이 붉은 노을 이불 삼아 고단한 하루를 뉘어가는 강화 건평항. 막걸리 한 잔 손에 든 시인이 “그 정도면 잘 살았다”며 너털웃음으로 위로 건네는 작은 항구에서 2025년을 떠나보낸다.

 

세계일보 여행면. 편집=김창환 기자
세계일보 여행면. 편집=김창환 기자

◆두 강이 만나는 연미정

 

기어이 한 해 저물어 간다. 가슴 한구석에 못다 한 일들, 말들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이 옹이처럼 박혀 있는데도. 하지만 쏜살처럼 빠른 시간 앞에서 무얼 할 수 있을까. 더 잘하지 못한 날, 미처 놓지 못한 마음 꽁꽁 묶어 저녁노을 빛 풀린 파도에 던져버리려 서해로 달린다.

 

수도권에서 한두 시간이면 닿는 인천 강화도는 동막해변, 장화리일몰조망지 등 낙조 명소가 넘쳐나기에 한 해를 떠나보내기에 안성맞춤이다. 강화대교를 건너 북쪽으로 10여분 달리면 만나는 연미정에서 여행을 시작한다.

 

월곶돈대 조해루.
연미정.

입구로 들어서자 언덕 위에 타원형 성곽으로 둘러싸인 월곶돈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연미정은 이 월곶돈대 안에 모습을 감추고 있다. 고개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문을 통과하면 거대한 느티나무, 고풍스러운 정자, 돈대 성곽, 푸른 강이 어우러지는 예쁜 풍경이 펼쳐진다. 최소 540살을 넘긴 느티나무는 잎을 다 떨궜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의 주름진 이마처럼 가지를 구불구불 펼쳐 고목의 지나온 시간을 얘기한다. 연미정 왼쪽에도 비슷한 수령의 느티나무가 있었지만 2019년 태풍 ‘링링’ 때 부러지고 말았다. 밑동만 남은 나무 앞바닥에는 쓰러지기 전 나무 모습을 작은 돌로 수놓아 이제는 사라진 고목을 추억한다.

 

연미정 부러진 느티나무.

월곶돈대 북쪽 성곽으로 다가서자 한강과 임진강이 하나 돼 서해로 흐르는 탁 트인 풍경이 가슴을 시원하게 열어준다. 강 건너 북한 개풍군 땅은 손에 닿을 듯 가깝다. 한강과 임진강이 섞인 물줄기는 강화도 동북단에 이르러 서해와 남쪽 강화해협(염하)으로 나뉘어 흐르는데 이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를 닮아서 연미정(燕尾亭)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강화 10경의 하나로 특히 달밤이 흐를 때 빼어난 정취를 자랑한다. 옛날에는 서해에서 서울로 향하던 배가 모두 연미정 아래에서 닻을 내렸다가 조류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정묘호란 때 인조가 후금과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은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연미정과 월곶돈대 성곽.
황형장군택지비.

월곶돈대 입구와 연미정 앞에는 ‘황형장군택지비’가 세워져 있다. 연미정은 원래 조선 연산군과 중종 시대 무신 황형 장군의 집이 있던 곳. 그는 1510년 삼포왜란 때 전라좌도 방어사로 왜적을 무찌르는 등 큰 공을 세워 연미정과 주변 땅을 하사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황형 장군에 얽힌 ‘볶은 콩’ 설화가 전해진다. 은퇴 후에도 연미정에 올라 바다를 보며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던 장군은 언젠가 큰 난리가 날 것을 예견한다. 이에 마을 아이들에게 볶은 콩을 나눠 주며 바닷가에 어린 소나무와 느티나무를 심게 했다. 마을 사람들은 “다 늙어서 나무는 왜 심느냐”며 의아해했지만, 70여 년 뒤 임진왜란이 터지자 그가 심은 나무들이 자라 함선을 만드는 재료로 요긴하게 쓰였다. 현재 연미정을 지키는 느티나무도 그때 심은 나무 중 하나로 전해진다.

 

천상병귀천공원.

◆‘막걸리 시인’ 천상병을 만나다

 

연미정에서 차를 몰아 남쪽으로 30여분 달리면 동막해변이 나타난다. 동쪽 높은 언덕에 자리 잡은 분오리돈대는 드넓게 펼쳐진 갯벌을 붉게 물들이는 장엄한 저녁노을을 만끽할 수 있는 명소. 특히 기온이 섭씨 영하 10도 밑으로 떨어지는 한겨울에는 갯벌이 얼어붙으면서 거대한 얼음왕국으로 변신하는 장관을 선사한다.

 

동막해변에서 서쪽으로 10여분 거리 장화리일몰조망지는 안면도 꽃지해변, 변산반도 채석강과 함께 서해안 3대 낙조 조망지로 연말이면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다. 강화도에서 낙조가 가장 아름다운 마을이라 ‘해넘이 마을’로 불린다. 접근로가 좁아 인근 공용 주차장에 주차한 뒤 논밭 샛길 따라 약 10분 걸어 들어가야 전망대가 나온다. 작은 무인도 위로 해가 걸리는 풍경이 일품으로, 2022년 방영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주인공들이 찾은 곳으로 등장하면서 ‘일몰 맛집’으로 입소문이 났다.

 

천상병 시인 조각상.

많은 인파로 북적거리는 곳이 싫다면 석모도 가는 길에 만나는 건평항으로 가면 된다. 소규모 어선들이 드나드는 작고 소박한 항구여서 호젓하게 나만의 고요한 저녁노을을 즐길 수 있다. 특히 석모도 남쪽 끝자락으로 떨어지는 붉은 해와 정박한 어선들이 어우러지는 낭만 가득한 풍경이 매력이다. 건평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여행지가 하나 있다. ‘막걸리 시인’ 천상병(1930∼1993)을 기리는 천상병귀천공원으로 2017년 문을 열었다. 공원 중심에 세운 시인의 청동 조각상을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하다. 제대로 먹지 못해 깡마른 작은 체구의 시인은 오른손에 막걸리, 왼손에 잔을 든 채 이빨이 빠진 입을 활짝 벌리고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고 있다. 조각가 박상희의 작품이다. 이곳에 천상병귀천공원을 만든 이유가 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로 끝나는 시인의 대표작 ‘귀천(歸天)’이 탄생한 곳이 바로 건평항이다. 경남 마산이 고향인 그는 돌아갈 여비가 없어 고향 바다가 그리울 때면 서울에서 가까운 건평나루를 드나들며 향수를 달랬다. 동료 시인 박재삼과 건평나루 주막에서 막걸리 한 잔 기울이면서 끼적여 메모로 건넨 시가 바로 귀천이다. 조각상 옆 바위에는 시인의 육필을 그대로 옮겨 ‘귀천’을 새겼다.

 

천상병귀천공원.

그는 19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돼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비운의 시인.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는 유럽 거주 유학생, 교수, 예술가 등 지식인들이 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을 드나들며 간첩 활동을 했다고 발표했다. 명단에는 강빈구 서울대 교수가 포함됐는데, 중정은 천상병이 서울대 상대 동문인 강 교수에게서 막걸리 값으로 받은 푼돈을 ‘간첩 포섭 자금’으로 몰았다. 모진 고문을 당한 천상병은 후유증으로 폐인이 되다시피 해 떠돌아다니다 실종되고 만다. 이에 행방이 묘연한 천상병이 객사한 것으로 판단한 박재삼과 동료들이 1971년 천상병의 시를 모아 유작 시집이자 첫 시집 ‘새’를 발표했고 여기에 포함된 대표작이 ‘귀천’이다. 시집 덕분에 정신병원에 행려병자로 수용됐던 천상병의 생존이 확인됐고, 그는 이후 ‘주막에서’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등 여러 시집을 펴냈다. 천상병 조각상 어깨에 앉은 새는 첫 시집이자 시인의 자유정신을 상징한다.

 

칠면초 해안길 공원 포토존.
민머루해변.

◆철 지난 바닷가에 서서

 

노을 지려면 시간이 많이 남아 가까운 석모도 칠면초 해안길 공원으로 향한다. 칠면초(七面草)는 계절에 따라 색이 일곱 차례 변해 이런 이름을 얻었다. 봄과 여름에는 초록색을 띠다가 찬바람이 부는 9월 중순~10월 중순 붉은색으로 변해 ‘바다의 단풍’이라 불린다. 전망대에 서면 끝없이 펼쳐진 갯벌을 가득 채운 칠면초 군락이 장관이다. 절정은 지났지만 자줏빛과 갈색이 어우러져 스산한 겨울의 낭만을 더한다. 철 지난 민머루 해변도 쓸쓸하지만 썰물 때 찾으면 석양이 찰랑거리는 갯벌 바닷물에 붉은 그림자를 만드는 그림 같은 풍경을 선물받는다. 석모도 바다의 낙조를 파노라마로 즐기려면 낙가산의 해수관음 성지 보문사에 오르면 된다. 다양한 표정의 오백나한, 길이 13.5m·높이 2m의 거대한 와불, 눈썹바위 밑에 새긴 신비한 마애석불좌상 등 볼거리가 많다.

 

건평항 어린왕자 포토존.
건평항 저녁 노을.

다시 건평항으로 차를 몰아 달리자 서서히 해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바다가 잘 보이는 전망대 벤치에 놓인 어린왕자 옆에 앉아 지는 해 바라본다. 마음이 슬플 때 노을 보는 걸 좋아한 어린왕자처럼. 붉게 타오르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태양. 수평선 장식하던 아스라한 붉은 빛마저 검은 어둠속에 잠길 때, 서글픈 미련들 모두 저 바다 깊숙하게 던져 버린다. 잘 가. 다시 오지 않을 202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