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청’부터 ‘미러’까지…고전 뒤집고 현실 직면한 신작들의 열전

대학로 소극장에서 태어난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미국 토니상 6관왕을 석권한 2025년 국내 공연 시장은 외형과 이를 채우는 내면 모두 부쩍 성장한 모습을 나타냈다. 

 

예술경영지원센터가 운영하는 공연예술통합전산망을 통해  25일까지 집계된 국내 공연시장 티켓 매출은 총 1조6775억원대. 이는 전년 1조4357억원보다 2418억원, 16.8%나 증가한 규모다. 다만 질적으로는 ‘스타’가 출연하는 무대에 관객이 집중하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했다. 그런데도 다양한 신작들이 새로운 경지의 예술을 보여주며 ‘K-컬쳐’의 기반을 두텁게 했다.

국립창극단의 판소리극 ‘심청’. 국립창극단 제공

◆판소리 오페라 ‘심청’과 이자람의 ‘눈, 눈, 눈’

 

올 한해 무대에 오른 신작 중 가장 주목받은 작품은 국립창극단 ‘심청’이다. 국립극장과 전주세계소리축제 공동제작으로 독일에서 활동하는 오페라 연출가 요나 김은 고전을 과감히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효녀 심청’이란 고정관념을 깨고, 사회적 약자와 억울한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무대를 선보였다. 판소리 ‘심청가’의 주요 대목을 원형 그대로 사용하되, 순서를 바꾸고 상황을 재구성해 파격 서사를 만들어냈다. 시대불변의 덕목 ‘효’를 정면으로 부정하며 우리 사회 가장 약한 존재로서 희생당한 딸들을 위한 진혼제를 무대에 펼쳐 보였다. 유럽 제작진이 만들어낸  무대는 간결하지만, 미장센과 상징으로 가득한 무대 예술의 묘미를 보여줬다. 파격적 서사에 일부 관객이 중도 퇴장하는 장면도 목격됐지만, 창극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줬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소리꾼 이자람의 ‘눈, 눈, 눈’. LG아트센터 제공

소리꾼 이자람도 5년만의 신작 ‘눈, 눈, 눈’으로  창작판소리가 지닌 압도적 힘을 보여줬다. 110분 공연 내내 오로지 부채와 소리만으로 관객 눈앞에 러시아 설원을 펼쳐 보이며 톨스토이 단편 ‘마스터 앤드 맨(주인과 하인)’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도덕적’이라 자부하는 부자 바실리와 묵묵한 일꾼 니키타, 말 제티가 등장했다. 부자의 고집과 위험한 선택이 반복될수록 객석의 탄식이 이어지고, 이자람은 능청스런 호흡으로 무대를 쥐락펴락했다. 러시아 광야 속 길잃은 주인공 일행을 마치 높이 뜬 새처럼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눈밭을 헤치고 다니느라 지친 말의 땀에 젖은 말갈기까지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는 이자람의 무대는 독보적이었다. 2007년 ‘사천가’, 2011년 ‘억척가’, 2014년 ‘이방인의 노래’에서 기른 힘으로 보여준 자신의 역작 ‘노인과 바다(2019)’를 넘어선 신작으로 자신의 판소리가 계속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연극 ‘미러’. 엠비제트컴퍼니

◆연극 ‘미러’와 스타 연출가 고선웅

 

‘디 이펙트’, ‘라이프 오브 파이’, ‘안트로폴리스I,II’ 등 해외 작품 한국 초연과 ‘삼매경’, ‘베를리너’ 등 한국 창작 신작이 다수 선보인 연극계에서 엠비제트컴퍼니가 선보인 ‘미러’는 초연작으로서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 “이 공연은 허가되지 않았습니다’라는 선언으로 시작하는 결혼식으로 위장한 비밀 연극은 검열이 예술을 금지할 뿐 아니라 포섭·길들이는 권력 기술임을 체감시켰다. 독재국가 문화부 국장 첼릭은 ‘예술은 국가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며 신참 작가 아덤을 선전극으로 유도하고, 아덤은 ‘진실을 말하고 싶다’는 신념으로 검열 회의 자체를 대본화해 무대 위에서 펼쳐 보였다. 취향 있는 폭력의 얼굴 첼릭, 체제에 안주한 백스, 침묵에서 저항으로 옮겨가는 메이의 변화가 배우들의 정교한 호흡을 통해 몰입감있게 전개됐다. 한국 현실과도 맞닿은 표현의 자유를 강렬한 서사로 구현하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작품은 연일 매진을 기록했다.

연극 ‘유령’. 세종문화회관 제공

연출가 고선웅은 국립극단 대표작이 된 ‘조씨고아’ 10주년 기념공연을 국립극장 해오름에 올렸다. 스타 마케팅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대극장 공연을 전석 매진시켜 연극이 지닌 힘을 보여줬다. 또 서울시극단 창작극 ‘유령’과 단단한 소리의 힘과 서사가 돋보인 정동극장 창극 ‘서편제: 디 오리지널’ 두 편의 신작을 선보이며 당대 스타 연출가로서 역량을 보여줬다. 특히 ‘유령’은 무연고 사망자와 가정폭력이라는 무거운 현실을 블랙코미디와 극 중 극 형식으로 다뤄 관객을 웃기면서도 불편하게 만들었다. 산 자와 죽은 자, 배역과 배우의 경계를 흐리고 객석까지 무대로 끌어들이며 ‘연극 속 현실’의 체험을 강화한 작품이었다. 폭력 장면에 슬로 모션과 팝 음악을 겹쳐 충격을 완화하는 동시에 비극을 사회적 풍경으로 확장하는 능수능란한 연출이 돋보였다. 영안실 유령들의 사연과 씻김굿으로 이어지는 피날레는 죽어서도 사람 대접받지 못한 이들을 위로하며, “견디는 삶”에 대한 묵직한 연민을 선명히 각인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