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방문했던 중국 허베이성 난위춘은 가난했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과 의욕이 흘렀던 마을로 기억하고 있다. 수려한 경관으로 잘 알려진 백리협과 십도가 인근에 있는 까닭에 언덕에서 내려다 보는 마을 전경은 마치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했다. 마을을 가로 지르는 길 한쪽을 따라 걷다 보면, 곳곳의 폐가를 새집과 펜션으로 보수하는 작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난위춘은 중국 내에서도 매우 빈곤한 곳이었다. 방문하기 2년 전인 2016년만 해도 총 224가구 중 59가구(103명)가 연 소득 2000위안(33만원) 안팎으로 빈곤율이 26%에 달했다. 가난에 허덕이던 마을을 바꾼 것은 중국에 진출했던 한국 기업 삼성이었다. 중국삼성과 중국부빈기금회(中國扶貧基金會)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활동의 하나로 2015년 이곳을 ‘삼성 나눔 빌리지’ 사업 대상마을로 선정했다. 낙후된 폐가를 고급 민박으로 바꾸고, 마을에서 직접 운영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반년 만에 174만위안(약 2억9500만원)의 수익을 올리며 성공적인 탈빈곤 마을로 변신했다. 외지로 나갔던 청년 20여명이 돌아와 마을에는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중국 내 호평을 받은 삼성의 CSR 활동은 긍정적인 기업 외교(Corporate Diplomacy)의 한 단면으로 평가받았다.
21세기 패권을 다투는 기술 전쟁이 격화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가 각자 영역에 머물던 시대는 끝났다. 우리는 정치가 기업 활동을 규정하고, 기업 활동이 다시 정치에 영향을 주는 새로운 시대로 진입했다. 세계사적 흐름인 ‘정경일체’의 신패러다임 속에서 한 기업의 생존에는 ‘기술초격차’에만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간 기업외교도 필수적인 시대가 왔다.
이는 단순한 로비나 대정부 업무가 아니다. 본국 정부 지원만을 기다리지 않고, 기업 스스로 외교 행위자가 되어 공급망 재편에 맞춘 투자 전략 지역을 조정하고, 현지 정부와 사회에 녹아드는 관계를 구축하고, 글로벌 규범이나 표준·CSR도 관리하는 토털 생존 전략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병철 전 삼성전자 부사장은 저서 ‘K-반도체 초격차전략’를 통해 미·중 기술패권 경쟁이 심화하는 ‘기정학(技政學) 시대'에 한국 기업 생존 전략으로 기술 초격차와 기업외교의 중요성을 지적했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 시대에 중국과 미국 양 쪽에 현지 생산기지가 있는 삼성의 고민은 대한민국의 고민을 상징한다. 만약 미국의 대중국 압박 정책에 동참한다면 삼성의 중국 내 다른 산업이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또 동참하지 않는다면 미국으로부터의 불이익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반대로 중국이 현재의 반도체 기술을 극복한다면 오히려 중국 내에서 삼성 반도체의 필요성이 줄어들 수 밖에 없다. 미·중 사이 한국 딜레마의 축소판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반도체 산업의 미래뿐만 아니라 한 국가의 산업이 생존할 수 있는 생존 전략의 화두를 독자에게 던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