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주권… 최재은 개인전 '약속'

EP 1. 문명이전의 생명과 상호연대

인류를 중심으로 한 서사 아닌
긴 시간 지키고 견뎌온 주인인 자연
이름도 몰랐던 들풀과 들꽃
식물들의 이름을 하나 둘 명명하며
자연의 완성대신 축적의 미학 전해

1974년 에티오피아에서 발굴된 ‘루시(Lucy)’는 한때 ‘최초의 인류’로 추정되며, 인류사 출발선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최재은은 인류 기원을 중심 서사로 끌어올리는 대신 , 루시를 자연의 긴 시간 속에 놓인 하나의 존재로 다시 불러낸다. 작가는 화석의 골반에서 드러나는 여성성과 생성 구조에 주목해 히말라야산 한백옥돌을 잘게 절단해 육각형 단위로 재구성한다. 세포를 닮은 육각형 조각은 네 갈래 뼈대를 이루는 역삼각형 골격으로 솟아올라, 층층이 쌓인 지층처럼 축적된 생명의 시간을 시각화한다. 조각을 감싸 안은 자작나무 구조물은 긴 시간을 함께 견뎌온 존재가 인간만이 아니었음을 말없이 증언한다.

'루시'

조각·영상·설치·건축을 넘나들며 생명과 자연의 관계를 탐구해 온 최재은 개인전 ‘약속’은 인간이 만든 규칙이 아닌 문명 이전부터 존재해 온 생명 간의 상호 연대성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전시장 입구에 놓인 ‘루시’ 조각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바다 이미지를 배경으로 10초마다 전송되는 전 세계 해수면 온도 실시간 데이터가 화면을 가로지른다. 영상 연작 ‘대답 없는 지평’에서 숫자들은 과장된 설명 없이 조용히 갱신될 뿐이지만 인류의 기원과 오늘의 생태 위기가 하나의 시간축 위에서 맞닿아 있음을 직감하게 한다. ‘소우주’ 섹션은 시간 감각을 미시의 차원에서 보여준다. 땅속에 묻혔다 다시 꺼낸 종이 표면, 현미경으로 확대한 미세한 결, 돌 위에 축적된 이끼는 자연의 시간이 품어 온 층위를 보여준다. ‘월드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에서 종이는 토양이 그린 그림이 되고, ‘숨을 배우는 돌’은 생명이 돌의 표면을 천천히 바꾸어 온 시간을 가시화한다. 자연은 완성이라기보다 축적으로 존재한다.

‘월드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

‘미명’은 이름 없는 존재들을 호명하는 자리다. 최재은은 일상에서 만난 들꽃과 들풀 560점을 수집해 그 이름과 이야기를 찾아 기록해 왔다. 주변부로 밀려 있던 존재들이 제 이름을 찾게 되며 고유한 생명으로 전면에 선다. 22일 전시장에서 만난 최재은은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프로젝트는 식물의 주권을 찾아주는 작업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90%의 식물은 인간에게 혜택을 주고 있는데, 우리는 이름조차 알 수가 없었다”며 “이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가고 있는 걸 보면서 ‘우리에게 그들이 없으면 과연 생존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고, 그 질문이 작업의 바탕이 됐다”고 말했다. 천재 뮤지션인 장영규 음악감독과 협업한 음향 설치 ‘이름 부르기’ 역시 산업혁명 이후 멸종된 종들을 호명한다. 숨결이 실린 목소리는 차가운 표본을 살아 있는 존재로 되돌려 놓으며 사라져 가는 세계의 규모와 속도를 체감하게 한다.

최재은은 마지막 섹션 ‘자연국가’에서 공생의 가능성을 구체적인 상상으로 확장한다. 2014년 시작된 ‘대지의 꿈’과 그 연장선의 ‘자연국가’ 프로젝트는 비무장지대(DMZ)를 군사적 경계가 아니라 자연이 주권을 가진 공간으로 상정한다. 작가는 국내외 건축가·생태학자와 협업해 생태 현황을 분석하고, 파편화된 나지에 상응하는 식재 계획을 세우며 ‘생태 현황 분석도’를 구축했다. 이번 전시에는 종자 볼(Seed Bomb)에 사용되는 40여종의 씨앗과 매뉴얼이 공개되고, 관람객은 웹사이트를 통해 원하는 구역에 종자 볼 기부를 약정할 수 있다.

‘증오는 눈처럼 녹는다’

관객들은 또 DMZ 철조망을 녹여 만든 징검다리 ‘증오는 눈처럼 녹는다’라는 작품을 통해 분단의 표상을 두 발로 건넌다. 경계를 상징하던 재료가 발판으로 바뀌는 순간, 인간이 만든 경계와 자연의 무경계가 겹쳐 보인다. 전쟁의 기억이 남아 있는 땅에서 수많은 생명이 역설적으로 번성하고 있다는 사실은, 자연의 주권에 대한 강력한 은유가 된다. 전시는 내년 4월5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