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년, 푸른 뱀의 해가 저문다. 지혜와 변화, 재생을 상징한다는 이름과 달리 올 한 해는 적지 않은 이들에게 숨죽인 긴장과 누적된 상처의 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특히 정치의 작동방식이 가장 날카로웠던 자리에서 종교인들은 가장 깊이 상처를 입었다. 정치는 언제나 결과보다 기억으로 남는다. 정책의 총합보다 어떤 장면이 사람의 마음에 각인되었는가가 그해의 얼굴을 결정한다. 2025년을 돌아볼 때 종교인들에게 먼저 각인되는 것은 경제 지표도, AI 전략도 아니다. 바로 ‘특검’이었다.
특검이라는 이름 아래 특정 종교단체가 정교유착의 상징처럼 지목되고, 총재 구속과 하루가 멀다 하고 반복된 의혹 보도 속에서 교단 전체가 하나의 프레임으로 재단되던 순간들이다. 그 과정에서 교인들은 법의 판단 이전에 사회적 의심과 섣부른 단정을 먼저 경험했다. 이 기억은 과민함도, 편향도 아니다. 그저 정치가 사람의 삶에 남긴 상처에 대한 명백한 기억일뿐이다.
사람은 제도의 논리보다 존엄이 흔들린 순간을 더 오래 기억한다. 올해의 정치는 ‘무엇을 했는가’보다 ‘누구를 겨냥했는가’라는 질문으로 체험되었다. 특검은 분명 제도적 장치였지만, 그 집행 방식과 절차가 반복적으로 특정 공동체를 겨냥할 때, 정의는 쉽게 ‘표적 수사’라는 메시지로 읽혔다. 설명 없는 단정과 증폭된 보도는 상처를 더 깊게 남겼다.
이재명 대통령은 국민적 지지를 바탕으로 올해 6월 4일 국가 최고책임자로서 임기를 시작했다. 이재명 정부는 그 신뢰 위에서 힘과 방향을 얻었고, 의미 있는 성과도 거두었다. 집권 초반, 특검과 고강도 수사를 단행하며 권력과 자본, 조직을 가리지 않겠다는 강력한 개혁 의지를 분명히 각인시켰다. 이 과정은 지지층에게 타협 없는 정부라는 이미지를 공고히 하는 한편, 국정 논쟁의 축을 경제나 외교에서 정의·청산·책임이라는 도덕적 프레임으로 전환하는 효과를 낳았다. 또한 검찰과 사정기관이 국정 기조에 따라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국가 권력이 결코 느슨하게 집행되지 않는다는 인식을 국민에게 분명히 심어주었다.
동시에 잃은 것도 있다. 수사가 사안보다 상징으로 기능하면서 흔들린 중립성과 공정성에 대한 도덕적 권위, 종교와 시민사회와의 신뢰, 그리고 무엇보다 정치가 취해야 할 태도의 결이다. 정의를 말했지만 위로는 부족했고, 설명은 있었지만 공감은 전달되지 않았다. 그 상처는 통일교와 교인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말하면 의심받을까 침묵해야 했던 중도 정치인들, 비주류·소수 종교인들, 갈등을 중재하려다 양쪽 모두에게 압박받은 시민사회와 지식인들, 그리고 찬반의 언어로 자신을 정리할 수 없어 입을 닫아버린 평범한 시민들 모두의 상처였다. 정치적 갈등은 결국 가정과 공동체로 스며들어 관계를 피로하게 만들었다. 국가가 흔들릴수록 가정과 사회단체가 완충 역할을 해야 함에도 위기의 부담을 그대로 떠안는 공간이 되는 현실은 올해 더욱 선명해졌다.
이 시점에서 ‘화합’을 말하기란 쉽지 않다. 정치가 계산과 속도, 선명한 진영 논리로만 매몰될수록 화합의 메시지는 공허한 수사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화합을 포기할 수 없다. 이유는 단순하다. 대한민국이라는 한배를 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생각해볼 것은 조화의 감각이다. 국가가 어려울수록 제도와 힘의 논리만으로는 사회를 지탱할 수 없다. 가정과 공동체, 종교와 시민사회가 지켜온 미세한 질서, 곧 서로를 완전히 지우지 않는 감각이 마지막 버팀목이 된다. 그 감각을 가장 잘 보여주는 비유가 바로 합창이다. 합창에서는 모든 음이 같을 필요가 없다. 어떤 파트는 두드러지지 않아도 되고, 어떤 음은 잠시 쉬어도 전체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서로의 소리를 지우지 않는 질서, 각자의 호흡을 존중하는 약속이다. 올해의 정치가 솔로의 힘을 보여주었다면, 내년의 사회가 회복해야 할 것은 합창의 감각이다.
내일이면 병오년, 붉은 말의 해가 시작된다. 분출되는 힘과 가속된 결정, 그리고 드러남이 특징인 해다. 갈등이든 개혁이든 더 분명하게 표면화될 것이다. 그렇기에 내년 정치의 과제는 달라져야 한다. “얼마나 밀어붙일 수 있는가”가 아니라, “남은 상처를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라는 물음이어야 한다. 정의를 집행하는 데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정의를 사회가 견딜 수 있는 방식으로 풀어낼 것인가. 정치에 상처받은 종교인은 정치에 등을 돌린 사람이 아니라, 여전히 정치가 회복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화합을 말하는 정치인은 종교를 사회의 감정과 신뢰를 복원하는 진정한 동반자로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평화는 서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보완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정치가 제도의 틀로 길을 닦는다면, 종교와 예술은 그 길을 걸어 나갈 용기를 키운다. 그 감각을 회복하는 일에서 내년의 희망은 다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