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6일, 미국 워싱턴 의회의사당을 향해 몰려든 군중은 미국 민주주의의 취약한 경계를 무너뜨렸다. 그 장면은 단지 도널드 트럼프의 패배 불복이 아니라 분노와 상실감이 정치로 조직된 ‘트럼피즘’이 미국 사회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렸는지를 드러낸 상징적 순간이었다.
트럼피즘은 트럼프 개인의 스타일을 넘어 미국 사회의 불안과 분열이 메시지·미디어·권력구조와 결합해 굳어진 하나의 정치적 현실이 됐다. 이 힘이 향후 미국 정치와 민주주의의 궤적을 어디까지 바꿔 놓을지, 그리고 어떤 형태로 진화할지가 지금 워싱턴과 세계가 마주한 가장 큰 질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름을 딴 단어 트럼피즘은 1990년대 초 사업가 트럼프 특유의 과시적 부와 허세를 가리키는 일종의 유행어로 등장했다. 그러다 그가 대선후보로 떠오른 2015년 이후 들어 트럼프식 정치 양상과 그것을 움직이는 정서를 지칭하는 말로 의미가 확장됐다.
트럼피즘은 정교한 정책이나 일관된 이념체계는 아니다. 그렇다고 기존 정치인과 다른 트럼프 개인의 매력만으로 설명하기도 어렵다. 전문가들은 개인의 스타일에 사회적 불만이 결합한 감정구조로 트럼피즘을 이해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공격적인 언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집회를 동원한 쇼 정치, 제도와 관행을 흔드는 행동 등이 유권자들의 감정과 만나 폭발했다는 것이다.
그 감정의 핵심은 ‘우리가 손해 보고 있다’는 인식이다. 제조업 일자리의 해외 이전과 공장 폐쇄, 금융위기 이후의 장기 불황, 소득 양극화 누적 등은 미국 중산층에게 ‘빼앗겼다’는 패배감과 피해의식을 남겼다.
트럼프가 이 감정을 끌어와 하나의 서사로 묶어낸 것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MAGA)와 ‘잊힌 남녀들’(The forgotten men and women)이라는 캐치프레이즈다.
미국이 위상을 잃었고 세상이 불공정해졌으며, 그 과정에서 보통의 미국인이 희생됐다는 주장이다. 이 메시지는 쇠퇴한 러스트벨트와 시골·소도시 유권자들에게 상실감과 자존심의 회복 욕구를 자극했다. “나는 여러분의 전사이자 정의, 그리고 복수”라는 트럼프의 외침은 미국 사회에 축적돼 있던 분노와 질서 회복 욕구를 노골적으로 끄집어낸 것이었다.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학장)는 “트럼피즘의 작동을 가능케 한 핵심 동인은 세계화에 대한 시장의 실패, 그리고 시장의 실패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국가의 실패, 두 가지로 꼽을 수 있다”면서 “트럼피즘은 미국 중산층의 경제적·이념적 패배감을 트럼프라는 정치 신인이 정치 이데올로기로 전환한 하나의 신념체계 및 세계관”이라고 설명했다.
◆‘실험’에서 ‘속도전’으로 진화
트럼프의 첫 번째 당선은 파격적이었으나 정부 운용 방식은 좌충우돌에 가까웠다. 취임 직후 ‘무슬림 입국 금지’ 행정명령이 법원에서 잇따라 제동에 걸렸고, 각료들의 잦은 경질과 교체를 거치면서 백악관 인사 운영도 임기 내내 불안정했다. 트럼프의 국정 지지율은 취임 직후 40% 후반대를 찍은 뒤 첫해 30%대 중후반까지 떨어졌다. 코로나19 대응 실패와 경기 충격, 인종차별 시위 등이 겹치면서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거부감이 누적됐고, 결국 2020년 4년 만에 실각하면서 트럼피즘은 꺾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트럼프를 지지했던 ‘잊힌 남녀들’의 분노와 상실감은 조 바이든 행정부 4년 동안 해소되지 않았다. 이 감정구조가 다시 트럼프를 소환하는 동력이 됐다. 2024년 대선에서 트럼프가 재집권에 성공하며 트럼피즘은 반짝 돌풍이 아닌 미국 보수정치의 주류로 복귀했다.
트럼프 2기의 내용은 1기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운영 방식은 1기에 비해 훨씬 정교하고 공격적이라는 평가다. 첫 임기 때는 워싱턴 주류 관료와 군·외교 엘리트가 곳곳에서 브레이크를 걸었다면, 지금은 충성 경쟁을 거쳐 선별된 측근·극우 성향 인사들이 내각과 요직을 채우면서 대통령 의중이 곧바로 정책으로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이민 추방, 관세 인상, 행정명령을 동원한 규제 개편 등을 1기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밀어붙였다. 국토안보부와 백악관 핵심 보좌진에 이민 규제 강경파와 1기 설계자들을 다시 중용해 대규모 불법 이민자 추방작전을 컨트롤타워 차원에서 총괄하도록 한 예가 대표적이다.
민정훈 국립외교원 미주연구부 교수는 “1기에는 시스템이 트럼프를 제어했지만, 2기에는 트럼프의 영향력이 행정부와 입법부 전반으로 확대돼 트럼프의 선호가 곧 국가 정책이 되는 국면”이라고 평가했다. 안인해 중국 런민대 특임교수는 “전통적 참모 구성이 그대로였던 1기와 달리, 2기에는 자신의 신념을 그대로 실행할 수 있는 측근 그룹을 내각과 주요 포스트에 기용해 트럼피즘을 실현하려 한다”고 진단했다.
◆‘정치 참여’ vs ‘민주주의 훼손’
트럼피즘은 분명 기존 정당이 포착하지 못했던 불만과 요구를 정치의 전면으로 끌어올렸다. 이 지점만큼은 트럼피즘이 미국 정치에 남긴 ‘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소외층의 분노를 정치 참여로 이끈 것만으로 민주주의가 더 건강해졌다고 보긴 어렵다.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기반을 뒤흔드는 부작용도 함께 커졌다는 것이 대체적인 진단이다. 특히 선거, 사법, 언론 등 핵심 제도에 대한 불신이 ‘음모론’과 결합해 공론장을 잠식한 점은 트럼피즘의 심각한 문제로 지적된다. 선거 결과가 조작 의혹의 대상이 되고, 불리한 판결과 비판적 보도는 ‘편향된 엘리트’의 공격으로 치부됐다. 박 교수는 “민주·공화 양당이 각각 소수자 문제, 감세, 신자유주의에 몰두하는 사이 지도자 양성과 소외계층 포용이라는 정당의 기본기능이 무너졌다”며 “정당이 채우지 못한 공간을 정당 밖의 트럼프가 파고들어 정치질서에 균열을 냈다”고 진단했다.
트럼피즘은 미국의 견제와 균형 시스템도 약화시켰다. 대통령 권한을 강화하고 관료·감독기구를 충성도 기준으로 재편하려는 움직임이 거세지면서 권력분립의 완충장치가 약해진 것이다. 민 교수는 트럼피즘이 “극단주의 부상을 가속화한 점”을 가장 큰 문제로 꼽으며 “세를 넓히기 위해 공화당 내 존재하던 소수의 극우 성향 ‘프리덤 코커스’ 세력을 끌어안아 극단주의를 현실정치의 무대로 올려놓았다”고 분석했다.
그 연장선에서 2021년 1월 대선 패배에 불복한 지지자들의 미 의회 난입 사태가 벌어졌고, 트럼피즘은 소외를 해소하는 ‘참여의 정치’인 동시에 제도적 신뢰와 정치적 포용이 결여될 때 민주주의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트럼프 이후의 트럼피즘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는 2029년 1월까지로 3년이 남았다. 그의 정치 퇴장이 트럼피즘의 종말을 의미할 것이냐는 질문에 전문가들의 답은 대체로 ‘아니다’에 가깝다. 트럼피즘이 개인숭배만으로 설명되기보다는 양질의 일자리 부족과 탈산업화, 제조업 재건 압력, 국력 변화에 따른 불안 등 구조적 조건에서 비롯된 현상이기 때문이다.
트럼피즘은 이미 미국 정치의 작동 방식과 권력의 균형을 바꿔 놓았다. 대통령의 권한이 어디까지 확장될지, 정부와 언론, 사법부에 대한 압박이 어느 선까지 이어질지, 그리고 이 모든 변화가 분열된 미국 사회와 정치질서에 어떤 형태로 남게 될지는 남은 트럼프 임기와 그 이후의 정치과정 속에서 지켜봐야 할 문제로 남아 있다.
조비연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미국의 구조적 환경과 내부 정치 조건이 바뀌지 않는 이상 제2, 제3의 트럼프가 충분히 나타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민 교수는 “민주당이 집권하더라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며 “민주당은 보조금과 산업 정책을, 공화당은 관세와 규제를 내세우더라도 국내 산업과 중산층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양당이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