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해 8월26일, ‘미혼부 출생신고법’(가족관계등록법 개정안·국민의힘 이양수 의원안)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 상정됐다. 미혼부의 출생신고를 규정하지 않은 가족관계등록법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른 후속 입법이었다.
그러나 회의에서는 “‘룸살롱 의혹’이 제기된 지귀연 부장판사를 조치했어야”(추미애 법사위원장), “조희대 (대법원장) 대선 개입을 낱낱이 밝혀야”(서영교 의원), “사법부가 특검 수사에 제동 걸어”(전현희 의원), “윤석열 내란수괴 강제구인해야”(이성윤 의원) 등 ‘내란 척결’을 앞세운 더불어민주당의 질의가 이어졌다. 결국 민생 입법과 관련해선 별다른 토론 없이 산회가 선포됐다.
#2. 지난해 11월26일, 법사위 전체회의에 민법 개정안(민주당 박지원 의원안)이 상정됐다. 패륜 등 부양의무를 위반한 상속인에게 유류분을 보장하는 것이 헌법불합치라는 판결을 반영해, 상속인의 기여도를 유류분 산정 기준에 포함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회의는 여당의 대법관 증원안과 이재명 대통령의 ‘이화영 재판 검사 감찰 지시’를 둘러싼 정치 공방으로 채워졌다.
국민의힘은 “대법관을 배로 늘려 불리한 판결을 뒤집으려는 후안무치”(곽규택 의원), “대통령은 이화영과 공범”(주진우 의원)이라고 공세를 폈고, 범여권은 “검찰의 조작기소 탓”(이성윤 의원), “검사 난동”(박은정 의원)이라며 맞서며 민생 논의는 실종됐다. 박지원 의원이 나경원 의원을 향해 “나빠루”라며 고성을 지르는 등 소란까지 이어지며 민생 입법 논의는 사실상 실종됐다.
헌법에 위반되는 법률 28건(헌법불합치 12건·위헌 16건)이 11일 국회에서 표류하며 ‘입법공백’을 키우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위헌 법률은 판결 즉시 효력을 상실하고, 헌법불합치 법률 역시 입법 시한을 넘기면 효력이 사라져 피해자 보호나 범법 행위 규율이 어려워진다. 국회가 ‘입법 사각지대’를 사실상 방치하고 있는 셈이다. 여야가 정쟁에 매몰돼 민생을 외면하고,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는 대신 선거철 표심 계산에만 몰두한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22대 국회에서 입법공백을 메우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헌법에 위배된 법률 28건 가운데 5건을 제외한 대부분 법률에 대해 개정안이 발의됐다. 하지만 개정안이 각 상임위원회에 상정된 당시 회의록을 분석한 결과, 여야가 쟁점 현안·예산 등을 두고 격렬히 대치하며 법안 심사가 후순위로 밀린 사례가 적잖았다.
◆정쟁에 갇힌 ‘입법공백’
가장 많은 위헌·헌법불합치 법률이 묶여 있는 곳은 법사위로, 총 12건에 달했다. 이 가운데 ‘낙태죄’, ‘미혼부 출생신고법’, ‘8촌 이내 근친혼 금지법’ 등 5건의 헌법불합치 사안은 모두 개정 시한을 넘겼다. 특히 낙태죄의 경우 헌재 결정 이후 7년여간 입법공백이 이어지며 불법약물 시장만 키웠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그럼에도 법사위에서는 다수 의석을 차지한 민주당이 강경 개혁입법을 밀어붙이고, 국민의힘의 항의가 잇따르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행정안전위원회 소관 법률 9건(위헌 5건·헌법불합치 4건)도 개정을 기다리고 있다. 이 중 2009년 야간 옥외집회 금지와 관련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이 최장기 입법공백 사례로 남았다. 보수·진보 진영의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면서 16년 가까이 논의는 공전을 거듭하는 양상이다. 초·중등 교원의 정치 참여를 금지한 국가공무원법 역시 2020년 위헌 결정 이후 22대 국회에서만 7건의 개정안이 발의됐으나 진전은 미미하다.
이 밖에도 보건복지위원회 소관 2건(위헌 1건·헌법불합치 1건), 교육위원회·운영위원회·외교통일위원회 소관 위헌 법률 각 1건, 정무위원회 소관 헌법불합치 법률 1건이 후속 입법 없이 남아 있다. 특히 헌법불합치 법률의 경우 지난달 31일 입법 시한을 넘긴 ‘패륜상속금지법’(민법)이 더해지며, 총 8건이 이날 평균 1663일가량 시한을 넘기게 됐다.
◆국회, 표 계산에 갈등조정 회피
여야가 사회적 갈등을 조정해야 할 책무는 외면한 채 ‘표 계산’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 이후 이어진 법적 공백이 대표 사례다. 헌법재판소는 2019년 태아의 생명 보호라는 목적은 정당하지만, 모든 낙태를 일률적으로 금지·처벌하는 형법 조항은 과도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민주당 남인순 의원이 22대 국회 들어 처음으로 지난해 7월 인공임신중지 허용 범위를 확대하고, 약물 도입·건강보험적용 등을 추진하는 내용의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같은 해 8월18일 복지위 전체회의에서 남 의원은 오유경 식품의약품안전처장에게 임신중지 약물 도입이 이재명정부의 국정과제라는 점을 언급하며 정부 대응을 질의했지만, 오 처장은 “법체계 안에서 진행돼야 한다”는 입장만 반복했다.
여성계는 법 개정 이전에도 식약처 허가만으로 약물 도입이 가능하다고 주장해왔지만, 정부는 ‘입법이 우선’이라며 미온적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민주당 이수진 의원과 박주민 복지위원장도 모자보건법안 발의를 이어갔지만, 논의는 제자리걸음이다. 복지위 관계자는 “낙태 허용 여론이 높아지는 것이 현실이나, 일부 반대하는 사람들의 문자폭탄, 항의 집회에 의원들이 눈치를 본다”고 전했다.
탄소중립기본법 입법 시한도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산업계 직격탄”이라는 재계 원성에 입법은 한참 뒤처진 상황이다.
2024년 헌재는 ‘2031∼2049년 국가온실가스 감축 경로 미규정’을 문제 삼아 탄소중립기본법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개정 시한은 내달 28일까지다.
이에 정부는 2035년까지 2018년 대비 53∼61% 감축하는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를 내놨지만, 위헌성을 해소하기에는 미흡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시민사회는 국제 기준과 기후 정의에 부합하는 최소 61%의 감축 목표 수립을 요구해 왔다. 국회 기후특별위원회는 올 상반기 공론화를 거쳐 개정안을 마련한다는 방침이나, 입법 시한 경과는 불가피할 전망이다.
◆입법공백에 속앓이는 국민 몫
국회가 입법공백을 방치하며 결국 피해는 국민에게 돌아가고 있다.
불법 임신중지 약물 유통과 그에 따른 부작용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발간한 ‘입법공백 시기 여성의 임신중단 인식과 경험’ 보고서에 따르면, , 유산유도제의 온라인 불법 판매·광고 적발 건수는 2022년 643건에서 2024년 741건으로 증가했고, 이른바 ‘블랙마켓’(암시장)이 확대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온·오프라인이나 비산부인과를 통해 약물을 복용한 경험자 70명 가운데 91.4%는 메스꺼움과 구토, 복통, 고열, 심한 출혈 등 부작용을 겪었다고 응답했다. 응답자들은 “임신중단은 부르는 게 값”, “동네 병원 서너 곳을 찾아갔지만 수술을 해주지 않아 서울까지 올라갔다”는 경험을 털어놓기도 했다.
미혼부가 출생신고 과정에서 겪는 현실적 어려움도 여전하다. 현행 제도상 미혼부가 출생신고를 하려면 유전자 검사로 부자 관계를 입증한 뒤, 법원의 친생부 확인 소송까지 거쳐야 한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이름과 주민등록번호조차 부여받지 못한 채 건강보험 혜택과 아동수당 등 기본적인 보육·복지 체계에서 배제되는 형국이다. 최근 1차 민생회복 소비쿠폰 지급 대상에서 미혼부 자녀가 제외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후위기 입법공백의 부담은 미래세대가 떠안게 됐다. ‘기후 헌법소원’을 제기한 주체도 청소년과 영유아들이었다. 이들의 문제 제기는 헌법불합치 판결로 이어졌지만, 국가가 국민 기본권 보호를 위해 최소한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헌재의 판결 취지에도 국회 입법은 아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