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납액 지적 피하려 ‘편법 축소’… 1조4000억 날린 국세청 [뉴스 투데이]

감사원, 감사결과 공개

2020년 국회서 누계액 공개 요구
122조원 밝히면 업무부실 우려
기준 없이 100조 미만 축소 결정

소멸시효 앞당겨 납세의무 면제
상부 압력에 ‘체납액 축소’ 경쟁

세무 직원, 근무시간의 90% 할애
체납자 전화 한 통에 출금 해제도

국세청이 국세 체납액 누계 총액(누계체납액) 규모를 100조원 미만으로 떨어뜨릴 목적으로 수십조원을 임의로 축소했고, 이 중 1조4000억원은 영영 거둘 수 없게 된 것으로 드러났다. 체납액 징수에 힘써야 할 일선 지방국세청과 세무서는 상부의 지침을 이행하려 직원들을 독촉했고, 직원들은 위법성이 있음을 인지하고도 인사상 불이익을 우려해 시키는 대로 한 것으로 조사됐다.

사진=뉴시스

◆‘체납액 면제’ 경쟁 부추긴 세정당국

 

감사원이 12일 공개한 국세 체납징수 관리실태 감사 결과에 따르면 2020년 10월 국회로부터 누계체납액을 공개하라는 요구를 받은 국세청은 체납액이 122조원으로 집계되자 이대로 공개해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업무 부실이란 지적을 받을 것이 우려돼서였다. 이에 국세청은 어떠한 객관적 기준도 없이 누계체납액을 100조원 미만으로 낮추기로 결정했다. 그러고선 각 지방청에 누계체납액 감축 목표 20%를 일률적으로 하달한 뒤 일선 세무서를 닦달했다.

 

그들이 택한 ‘편법’은 고액·상습 체납자들의 국세 소멸시효를 앞당겨 완성해 납세 의무를 ‘면제’해주는 것이었다. 국세기본법상 체납액 5억원 미만은 소멸시효 5년, 그 이상은 10년이다. 소멸시효는 ‘압류해제일’부터 계산하게 돼 있다. 그런데 국세청은 기산점을 ‘추심일’ 또는 ‘압류일’ 등으로 앞당겨 적용하라고 지침을 내렸다. 심지어 체납액 축소 실적이 우수한 직원은 성과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줬고, 실적이 부실한 관서는 순위를 매겨 공개했다.

 

상부의 압력 속 세금을 걷으러 다녀야 할 세무 공무원들은 졸지에 ‘체납액 줄여주기’ 경쟁에 뛰어들었다.

 

서울 반포세무서는 423억원을 내지 않고 버티는 A씨에 대한 소멸시효 기산점을 앞당겨 계산해 완성시켰다. 국세청 덕에 A씨는 체납액 231억원을 면제받게 됐다.

 

남대구세무서는 227억원을 체납한 B씨의 압류 부동산 10건에 대해 ‘실익이 없다’는 이유로 압류 해제한 뒤 소멸시효를 완성시켜 거둬야 할 세금 139억원을 날렸다.

 

소멸시효를 완성하기 위한 전 단계인 압류해제를 성급하게 무더기로 하다 보니 고액·상습체납 명단공개자 5894명이 압류해제 대상자에 포함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 중엔 532억원을 체납한 전직 기업 회장, 아버지와 동생을 해외로 도피시키고 재산을 은닉하는 데 관여한 이도 있었다. 국세청으로부터 뜻밖의 ‘면세 혜택’을 받은 체납자 일부는 땅이나 건물, 아파트 분양권을 사들이며 자산을 증식했다.

◆체납자 전화 한 통에 출금도 해제

 

국세청은 체납자가 요구하면 압류도 풀어줬다. 서울국세청은 2015년 기준 209억원을 체납한 C씨와 그의 아들을 출국금지하고 명품가방 30점, 와인 1005병을 압류했다. C씨는 2년 뒤 명품가방들이 며느리 것이라며 압류해제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런데 2022년 재차 압류를 요구하자 서울청은 이를 들어줬다. 시가 4억8000만원에 달하는 와인들도 8년 만에 전부 돌려줬다.

 

이들 부자의 출국금지도 세 차례 풀어줬다. C씨가 2022년 8월 해외 기업 행사에 참석해야 한다며 출국금지 해제를 요청하자 국세청은 ‘국외 도피 우려가 없다’며 이를 수용했다.

 

C씨는 불과 3개월 전 국외 도피 우려가 있어 출국금지가 연장된 상태였다. 그해 12월 C씨는 다시 출국금지된다. 그런데 2023년 2월 해외 전시회에 참석해야 한다며 해제를 요청했고, 국세청은 또 수용했다. 2023년 9월엔 C씨의 아들이 공항에서 전화로 출국금지 해제를 요청하자 국세청은 이 역시 받아들였다.

◆직원들은 “감사 걸리면 어쩌나”

 

상명하복의 부작용은 일선 직원들의 자괴감으로 이어졌다. 한 세무서 직원은 “성과평가 마감이 임박했던 2023년 10월에는 근무 시간의 90% 이상을 체납액 축소에 투입했다”고 했다. 또 다른 이는 “‘나중에 감사 걸리면 어떡하냐’고 반발했지만, 당시 실적이 저조했고 상급자가 지속적으로 독려해 누계체납액을 축소했다”고 했다.

 

국세청 내부망에서도 “추후 이 같은 사실이 외부에 노출되거나 감사에 적발될 경우 누가 책임질지 막막하다”, “소멸시효 전문 브로커들 엄청 생겨나고 있다” 등 본청 지휘부를 향한 성토가 줄을 이었다. “직원들을 겁박하는 것인지, 고문하자는 것인지 묻고 싶다”, “몇억 체납이 그냥 소멸시효 완성 처리되는 현실에 자괴감마저 든다”는 한탄도 쏟아졌다. 국세청은 “인력·조직의 한계로 장기간 관리되지 않던 묵은 체납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일부 문제가 발생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감사원은 출국금지 해제 업무를 부당하게 처리한 5명을 징계하라고 국세청에 요구했다. 전직 국세청장 등 2명은 이미 퇴직해 징계할 수 없는 점을 고려해 향후 인사자료에 활용하라고 통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