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무관세 돌발 악재… 꼬이는 K반도체 [美 반도체 관세 촉각]

뉴스분석-美와 '최혜국' 줄다리기 예고

대만, 美에 736조원 투자 확정
상당부분 무관세 약속 얻어내

“美에 투자 않으면 100% 관세”
러트닉, 한국 등에 노골적 압박

靑 “불리하지 않은 조건 적용 명시
기조 유지 되도록 협의에 최선”

두 기업, 美에 이미 60조원 투자 확정
국내서도 천문학적 확장… ‘총알’ 부족

韓 메모리 반도체, AI 공급망 필수역할
고관세로 HBM 공급차질 땐 美도 타격

여한구 “2단계 조치 언제 확대될지 몰라”
정부 ‘정교한 줄타기 외교력’ 발휘 필요

대만 반도체 기업 등의 대미 5000억달러 투자를 고리로 미국과 대만의 관세 협상이 타결되면서 우리 정부와 반도체 업계가 긴장하고 있다. 조만간 미국과 마주할 반도체 관세 협상 테이블에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대만 모델’을 내세워 감당하기 어려운 투자 압박 청구서를 내밀 수 있기 때문이다.

 

자칫하다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사업 전략과 투자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고 최악의 경우 국내 반도체 생태계 공동화도 배제할 수 없다. 청와대는 지난해 한·미 관세 협상 당시 반도체와 관련해 ‘주요국 대비 불리하지 않은 조건(no less favorable)을 적용한다’고 명시한 만큼 우리 기업들에 미치는 영향이 최소화되도록 미국과 협의할 것이란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미국이 노골적으로 ‘우리가 흡족해할 만한 투자를 하지 않으면 고율 관세를 매기겠다’고 압박할 태세여서 정부가 반도체 업계와 머리를 맞대 협상력을 고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궁밍신 대만 경제부 장관이 16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체결된 미·대만 무역 협정에 대해 언론에 설명하고 있다. 궁 장관은 대만 상품에 대한 관세를 한국·일본과 마찬가지로 15%로 인하하는 데 합의했다며, 대만 제조기업들이 혜택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타이베이=로이터연합뉴스

지난 15일(현지시간) 타결된 미국과 대만 무역 합의의 핵심은 ‘투자와 관세의 맞교환’이다. 대만은 기업의 직접 투자 2500억달러(368조원)와 정부의 신용 보증 2500억달러를 합쳐 총 5000억달러(약 736조원) 규모의 패키지를 제시했다. 이에 미국은 상호관세율을 15%로 낮추되, 미국에 신규 공장을 짓는 대만 반도체 기업들은 건설 기간 중 기존 생산능력의 2.5배, 완공 후에는 1.5배까지 관세를 면제받는 ‘구체적이고 명확한 최혜국 대우’를 보장받았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 업체인 TSMC 등 대만 반도체 기업들이 사실상 미국 시장의 문턱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강력한 안전판을 확보한 것이다. 대만이 엄청난 대미 투자를 감수하기로 한 것은 중국의 대만 침공에 대비해 미국의 안보 우산을 기대한 ‘보험성’ 차원이란 분석도 나온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지난해 11월 한·미 관세 협상 과정에서 반도체의 경우 최대 경쟁국인 대만을 비롯해 다른 나라보다 불리하지 않은 대우를 받기로 한 게 전부다. 구체적인 무관세 보장 조건이나 쿼터 등은 명시되지 않았다. 미국 이익 극대화를 위해 변덕이 심한 트럼프 행정부를 상대로 한국은 모호한 ‘최혜국 대우’ 문구에 의존해 다시 힘겨운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셈이다.


특히 미국과 대만 합의에서 주목되는 지점은 대만이 약속한 투자 규모의 실체다. 외신들은 대만 기업의 직접 투자 2500억달러 대부분을 TSMC가 집행할 것으로 내다봤다. 블룸버그통신은 “TSMC가 미국 애리조나에 이미 계획된 6개 공장 외에 최소 4개 이상의 공장을 추가로 건설하기로 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기존 6개 공장 건설 계획에 드는 1650억달러(약 243조원)에 이번 관세 협상에서 추가로 850억달러(약 125조원)를 투자해 미국 내 공장 운영 규모를 10개 이상의 ‘기가팹’으로 확장했다는 분석이다.

 

◆삼성·SK 추가 투자 여력 ‘바닥’

 

대만의 ‘통 큰 베팅’은 한국 기업들엔 어깨를 짓누르는 부담으로 다가온다. 현재 삼성전자(텍사스주 테일러)와 SK하이닉스(인디애나주 패키징 공장)가 확정한 대미 직접 투자 규모는 약 408억7000만달러(60조원) 수준이다. TSMC가 주도하는 대만 기업들의 직접 투자 규모에 견주면 턱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추가 투자 여력이 마땅치도 않은데 미국이 대만 모델을 한국과의 협상 기준점으로 삼을 경우 난감해질 수밖에 없다. 삼성과 SK는 사활을 걸고 이미 국내에 천문학적 투자를 진행 중이다. SK하이닉스는 용인 반도체 산업단지(클러스터) 조성에 600조원을 투입하고, 삼성전자도 용인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360조원)와 평택 P5 라인(60조원), 기흥 차세대 연구개발(R&D) 단지(20조원) 등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어야 한다. 두 기업은 국내 반도체 생태계 강화와 대미 투자 요구를 동시에 충족시켜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리게 된 셈이다.

 

대만 사례에 비췄을 때 한국 반도체 산업에 대한 미국의 투자 강요는 당연한 수순일 공산이 커서다.

 

최근 트럼프 행정부가 발표한 반도체 포고령에는 1단계 조치로 엔비디아, AMD 등의 특정 AI칩에 25% 관세를 부과하고, 이후 반도체 전반으로 관세를 확대하는 ‘2단계 조치’를 예고했다. 미 행정부는 2단계 조치에 미국 내 투자 기업에만 혜택을 주는 ‘관세 상쇄 프로그램’ 도입을 명시하면서 사실상 한국 등 주요국에 “관세를 피하려면 미국에 공장을 지으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16일 뉴욕주 시러큐스 외곽의 마이크론 공장 착공식 참석 후에도 “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하고 싶다면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100% 관세를 내거나, 미국에 공장을 짓는 것”이라고 못 박았다.

 

방미 일정을 마치고 귀국한 여한구 산업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이와 관련, “2단계 조치가 언제, 어떤 형태로 확대될지 모르기 때문에 안심할 수 없다”고 경계했다.

 

청와대는 미국과 대만의 반도체 합의사항을 면밀히 분석하고 국내 반도체 업계와 소통하면서 미국 측과 협의해 나갈 방침이다. 이규연 청와대 홍보소통수석은 18일 브리핑에서 “지난해 한·미 관세 협상 ‘조인트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에 (반도체 관세와 관련) ‘주요국 대비 불리하지 않은 조건으로 진행한다’는 내용이 있었다”며 “이 기조가 앞으로도 계속 이뤄질 것이고, 그 기조하에 협의해 나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믿을 구석은 ‘대체 불가’ 한국 메모리

 

앞으로 과제는 우리 반도체 기업 피해 최소화와 국익 훼손 방지를 위해 협상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인공지능(AI) 시대에 필수적인 한국 메모리 반도체가 글로벌 AI 공급망에서 차지하는 독보적 위상이 강력한 협상 지렛대가 될 수 있다고 분석한다. 현재 엔비디아, AMD 등 미국의 AI칩 선두 주자들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공급하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없이는 제품 생산 자체가 불가능하다. 미국이 한국산 메모리에 고율 관세를 부과할 경우, 이는 곧 엔비디아와 AMD의 비용 폭증으로 이어져 미국 AI 산업 경쟁력을 갉아먹는 ‘부메랑 효과’를 초래할 수 있다. 미국 정부가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휘두른 칼날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셈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미국 빅테크 기업들이 한국산 HBM 없이 AI 패권 경쟁을 지속할 수 없다는 점은 우리의 강력한 무기”라며 “정부로선 미국의 과도한 투자 요구를 방어하고, 실리를 챙기는 정교한 줄타기 외교력을 발휘해야 할 때”라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