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들어 벌써 1월 하순이 되었는데도 여소야대 의회의 반대로 아직 올해 예산안을 확정하지 못한 프랑스 정부가 ‘의회 패싱(건너뛰기)’이란 칼을 빼들 것으로 보인다. 정부 입장에서 매우 시급한 법률안 및 예산안을 의회 표결 없이 확정할 수 있는 헌법적 권한을 동원하겠다는 뜻이다. 하원 과반 의석을 점한 야당들이 연대해 총리 불신임안을 가결하는 경우 프랑스 정국은 또 격랑에 빠져들 전망이다.
19일(현지시간) AFP 통신에 따르면 세바스티앵 르코르뉘 프랑스 총리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현재 하원에 계류 중인 예산안 통과를 위해 제5공화국 헌법 49조 3항을 발동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해당 조항은 정부가 원하는 법률안 및 예산안 등을 표결 없이 통과시킬 것을 하원에 요구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원이 이를 저지하려면 내각 불신임안을 가결시켜 총리를 끌어내리는 수밖에 없다. 다만 이 경우 대통령은 하원 해산 및 조기 총선거 실시로 맞설 수 있다.
르코르뉘 총리는 예산안 통과를 위해 오랫동안 야당들과 협상했으나 타결에 실패했음을 인정했다. 프랑스는 그간 방만한 예산 운영으로 재정 적자가 누적되며 국가 채무가 급증했다. 그로 인한 국가 신인도 하락으로 프랑스 경제의 미래에 대한 전망은 갈수록 암울해지고 있다. 이에 르코르뉘 총리 내각은 2026 회계연도를 앞두고 “공공 적자를 5%로 유지하겠다”며 긴축 예산안을 편성했다. 그러자 야당들은 복지 혜택 축소 등을 들어 좌우를 불문하고 정부의 2026년도 예산안에 강하게 반대해왔다.
이날 르코르뉘 총리는 “예산안 처리가 더 늦어지면 모두 막다른 길로 가게 될 것이란 결론에 도달했다”고 강조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도 “예산이 있어야 우리 국가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라는 말로 르코르뉘 총리의 결단을 지지했다. 다만 마크롱 대통령은 “예산을 위해 모두의 타협과 양보가 필요하다”며 여소야대 의회를 향해 마지막으로 협조를 당부했다.
프랑스는 2024년 7월 하원 총선 결과 좌파 연합인 신인민전선(NFP)이 원내 1당, 중도 여당이 2당, 그리고 극우 성향의 국민연합(RN)이 3당에 각각 등극했다. 문제는 어느 정치 세력도 단독으로는 원내 과반 의석을 차지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현재 프랑스는 원내 과반 의석에 한참 모자란 중도 여당이 소수파 정부를 꾸려 가까스로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
예산안의 의회 패싱을 위해 헌법 49조 3항을 발동키로 한 르코르뉘 총리의 방침에 RN은 강하게 반발했다. RN 지도자이자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인 마린 르펜 의원은 즉각 총리 불신임안 제출을 공언했다. NFP를 구성하는 여러 분파들 중에서도 가장 왼쪽인 극좌파 정당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LFI)도 총리 불신임 추진에 동조하고 나섰다.
여소야대 하원은 앞서 마크롱 대통령이 임명한 미셸 바르니에(2024년 9월∼12월 재임), 프랑수아 바이루(2024년 12월∼2025년 9월) 두 명의 총리를 불신임안 가결로 내쫓은 바 있다. 다만 르코르뉘 총리는 내심 야당인 사회당의 이탈로 불신임안이 부결되는 상황을 기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예산안 관련 협상에서 르코르뉘 총리는 사회당 주장을 대폭 수용했다. 사회당은 NFP를 구성한 여러 분파 중에서 상대적으로 온건한 세력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