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이 잠시 머문 평일 오후였다. 내내 흐린 날들이 계속되어 산책길이 어둡고 축축했다. 화단에 쌓인 낙엽들이 얼었다 녹기를 반복해 거뭇한 더께처럼 변해 있었다. 연석에 드문드문 동물 발자국이 찍혀 있어 그것을 보며 걷고 있는데 뒤에서 다급한 숨소리가 났다. 돌아볼 틈도 없이 체구가 작은 아이 하나가 나를 스쳐지나 화단으로 뛰어들어갔다. 빈 공간을 골라 뛴 아이는 금세 몸을 숨겼다. 환기구를 둘러싸고 꽤 큼직한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어 아이가 숨기에 맞춤인 공간이었다. 이곳저곳을 헤매다 뛰어들었는지 아이의 행적 그대로 젖은 발자국이 뚜렷했다. 길 위에 찍힌 점선처럼 아이의 발자국이 아이가 숨은 곳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는 셈이었다.
놀이터 쪽에서 큰 목소리가 들렸다. “다 숨었어?” 요즘 애들도 숨바꼭질을 하고 노나? 어느 곳에 숨든 옷이 다 젖을 텐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걸었다. 술래가 발자국을 따라 아이를 찾아낼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이제 열만 세고 찾는다!” 술래가 큰 소리로 숫자를 읊기 시작했다. 십! 구! 팔! 칠! 크게 한숨 삼키고는 육! 오! 조형물 뒤의 아이와 놀이터가 한눈에 보이는 지점으로 옮겨 나는 괜히 기지개를 켰다. 삼! 이! 지금인가 싶어 고개를 쭉 내밀었는데 어쩐 일인지 숫자가 계속 이어졌다. 일 반의반! 일 반의반의 반! 그리고 그 사이로 숨찬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잠깐, 잠깐만! 아이 하나가 아직 숨지 못했는지 어지러운 발소리가 뒤섞였다. 일 반의반의 반의반! 안 되겠는지 술래가 일! 하고 외침과 동시에 사방이 고요해졌다.
지금인가? 나는 다시금 고개를 뺐다. “영! 땡!” 술래는 거기까지 외친 다음에야 비로소 움직였다. 땡, 소리와 함께 조형물 뒤의 아이가 몸을 최대한 움츠렸고 놀이터 쪽이 일제히 소란스러워졌다. 그랬지 참, 어린 날의 숫자 세기는 저랬지, 하는 생각이 든 건 그다음이었다. 놀이할 때 아이들의 숫자 세기만큼 관대한 것이 또 있을까. 모두 숨거나 준비될 때까지 숫자를 끝없이 쪼개는 반의반의 반의 세계, 영 다음에 땡이 한 번 더 존재하는 세계. 그런 여지와 배려가 남아 있는 세계에서 너무 멀리 걸어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안보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