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늦게 올림픽 티켓을 땄지만, 금메달을 목에 걸고 이탈리아에서 가장 늦게 떠나겠다.”
한국 컬링 믹스더블(혼합복식) 국가대표 김선영(33·강릉시청)과 정영석(31·강원도청)이 지난 7일 충북 진천국가대표선수촌에서 열린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개막 D-30 미디어데이에서 당차게 밝힌 각오다.
두 선수는 한 달 전인 지난해 12월18일 캐나다에서 열린 올림픽 최종 예선(OQE) 플레이오프에서 세계랭킹 1위 호주 탈리 길-딘 휴잇 조와의 최종전에서 10-5로 승리하며 올림픽 출전 티켓을 거머쥐었다. 이미 출전 쿼터를 확보하고 국내 대표 선발전을 남겨뒀던 피겨스케이팅을 제외하고 올림픽 출전권을 딴 것으로는 ‘막차’인 셈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 코르티나담페초 얼음 위에서 ‘선영석’ 듀오는 금빛 설계도를 그리겠다는 각오만큼은 ‘1등’이다.
한국 컬링이 믹스더블에서 자력으로 올림픽 본선 티켓을 따낸 것은 김선영-정영석 조가 처음이다. 2018년 평창 대회 때는 믹스더블에 장혜지-이기정 조가 출전했지만 개최국 자격으로 참가했고 2022 베이징 대회는 티켓을 얻지 못했다.
컬링 믹스더블에서는 남자 선수는 스위핑(솔질), 여자 선수는 작전 지시를 맡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김선영-정영석 조는 반대다.
2018 평창 대회 당시 여자 컬링 ‘팀 킴’에서 세컨드로 활약하며 은메달 신화를 썼던 주역 중 하나인 김선영이 스위핑을 맡고, 평창 패럴림픽(장애인올림픽) 당시 전력분석원으로 참여했던 정영석이 전체적인 라인을 읽으며 스톤의 궤적을 설계하는 역할을 맡는다.
평창과 베이징에 이어 세 번째 올림픽에 나서는 베테랑 김선영이 ‘팀 킴’에서 다져진 정교한 샷 감각과 체력은 믹스더블의 빠른 템포를 견인하는 핵심 동력이다. 실업팀에 입단하지 못한 아픔을 컬링 강사와 전력분석가로 승화시키며 전술 이해도가 탁월한 정영석은 얼음의 상태를 파악하는 아이스 리딩을 통해 최적의 경로를 찾아내는 능력이 세계 정상급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역할 파괴’라는 승부수를 띄울 만한 최적의 조합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올림픽 시즌을 앞두고 지도자 부재라는 악조건도 견뎌야 했다. 대한컬링연맹은 임명섭 믹스더블 대표팀 감독이 ‘훈련을 제대로 진행하지 않았다’며 지난해 8월 ‘불승인’ 처분을 내렸다. 두 선수는 졸지에 지도자 없이 시즌을 치러야 하는 위기 상황에 부닥쳤지만 이것이 오히려 둘을 더욱 끈끈하게 만들었다. 두 선수가 직접 전술을 연구하고 훈련을 소화하며 이들의 케미는 더욱 단단해졌다. 김선영이 “나이로는 동생이지만 동료로서 영석이의 판단을 믿고 따른다”고 당당하게 말할 정도다. 이렇게 의지할 곳은 서로뿐이었던 시간은 경기 중 발생하는 변수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독보적인 위기관리 능력을 선물했다.
전문가들은 이들이 예선 라운드로빈(풀리그)에서 초반 기세를 잡는 것이 관건이라고 분석한다. 믹스더블은 총 8엔드로 진행되며 한 엔드에 스톤 5개만을 사용하기 때문에 흐름이 매우 빠르다. 특히 ‘파워플레이’를 어느 시점에 사용해 대량 득점을 뽑아내느냐가 승부처가 될 전망이다. 파워플레이는 믹스더블에만 있는 규정으로 경기 흐름을 단번에 뒤집을 ‘필살기’로 꼽힌다. 믹스더블은 엔드별로 첫 투구를 하기 전에 고정 스톤을 팀당 하나씩 놓는데 후공 팀이 파워플레이를 쓰면 먼저 놓아둔 스톤 2개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옆으로 치워놓고 투구하며 대량 득점을 노리는 전술이다. 파워플레이는 경기당 딱 한 번만 사용할 수 있고, 연장전엔 쓰지 못한다.
‘선영석’ 조의 활약은 이번 동계올림픽 한국 선수단 전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이들은 대회 공식 개막 이틀 전인 4일(현지시간) 스웨덴과 예선 첫 경기를 치른다. 한국 선수단 중 가장 먼저 경기를 시작하기 때문에 대회 초반 한국팀 전체의 사기를 결정짓는 중요한 가늠자가 될 전망이다.
10개 팀이 출전하는 이번 대회 믹스더블에서는 이탈리아, 노르웨이, 캐나다의 3강 체제로 평가받지만 ‘선영석’ 조는 이들을 모두 꺾어본 경험이 있다. 특히 김선영의 풍부한 큰 경기 경험과 정영석의 데이터 기반 전술이 시너지를 낸다면 이변의 주인공이 되기에 충분하다. 컬링협회 관계자는 “우리 팀은 정교한 배치보다는 상대의 실수를 유도하고 이를 놓치지 않는 ‘카운터 펀치’에 능하다”며 “초반 스웨덴과 이탈리아전에서 승점을 확보한다면 4강 진출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