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지 없이 30년 묵은 ‘통일 설계도’… 시대를 읽어라 [창간37-격변의 한반도, 평화의 길]

<상> 통일 인식, 구조적 변화 국면

YS 때 만든 ‘민족공동체통일방안’
정권·대북기조 달라져도 담론 유지
접근 방식만 바꾼 채 찬·반만 조사
49% “통일 필요”… 2025년 첫 50%↓

2015년 통일 비용 1경 428조 추산
분단 길어질수록 구조적 비용 막대
‘왜 해야 하는지’ 설명의 부재 지속
“미래세대, 부담으로 인식 가능성”
“통일이 왜 필요한지 잘 모르겠다.”

통일과 관련된 최근 여론조사에서 두드러지는 인식이다. 지난해 통일연구원 국민인식조사에서 통일이 필요하다고 한 대답은 49.0%로 2014년 조사를 시작한 이래 처음 절반 아래로 떨어졌다. 10년 전, 같은 응답이 68.5%였던 것과 비교하며 꽤 큰 차이다. 특히 2030세대는 47.3%만 필요성을 인정했다. 통일에 반대한다기보다는 왜 지금 이 문제를 논의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의식이 강해진 것이다. 통일에 대한 인식이 단기적 변동을 넘어 구조적 변화의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안보의식 하락, 젊은층의 이기주의 등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없지는 않으나 오랫동안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 왔던 ‘우리의 소원은 통일’에 거리를 두려는 인식이 강해지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역대 정부에서 통일을 포기한 적은 없다.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통일은 ‘지향해야 할 목표’였다. 하지만 통일 이후 어떤 상태가 될지, 어떤 방식으로 이뤄져야 하는지, 왜 지금 세대가 이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충분하지 않았다. 이런 의문을 해소하지 않은 상태에서 통일은 막대한 사회적, 재정적 부담으로만 인식될 수 있다는 지적이 강하다.

◆현실 반영 못한 비전, 통일 필요성 인식 하락



대한민국의 공식 통일방안은 1994년 김영삼정부 때 만들어진 ‘민족공동체통일방안’ 하나다. 정권이 여러 번 바뀌고, 대북 정책 기조도 그때마다 달라졌지만 국가 차원의 통일 설계도는 한 번도 개정되지 않았다. 통일부는 지금도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은 우리 정부의 공식 통일방안”이라고 밝히고 있다.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은 통일을 세 단계로 설명한다. ‘화해·협력 단계’, ‘남북연합 단계’, 그리고 ‘통일국가 완성 단계’다. 군사적 충돌이나 흡수통일을 배제하고, 신뢰를 축적해 점진적으로 통합하자는 구상이다. 냉전 종식 직후의 국제 환경과 남북 기본합의서 체결 분위기 속에서 당시로서는 현실적이고 진보적인 방안으로 평가받았다.

문제는 30년이 지난 지금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북한은 2022년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고, 이듬해 한국을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하는 노선을 공식화했다. 남북이 신뢰를 쌓아 연합 단계로 나아가겠다는 전제가 작동하기 어려워진 상황이 된 것이다. 민족 동질성 회복을 통일의 전제로 삼았던 구상 역시 한국 사회 내부에서 설득력이 떨어졌다. 통일의 ‘설계도’를 만들며 가정했던 조건이 크게 달라진 셈이다.

통일방안은 왜 바뀌지 않았을까. 김태경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연구보고서 ‘민족공동체통일방안 평가와 발전 방향’에서 “평화통일이라는 목적 자체를 둘러싼 국민적 합의 부족과 점진적·단계적 통일의 실행 방법을 둘러싼 정책적·정치적 논쟁 심화가 통일방안 이행의 제도적 기반을 제약해 왔다”고 지적했다. 통일방안에 손대는 순간 ‘통일 포기’ 논란이나 ‘흡수통일 회귀’ 논쟁이 동시에 불거질 수 있다. 헌법 4조가 규정한 ‘평화적 통일’의 해석 문제로 번질 가능성도 있다. 또 북한이 통일 논의에 나서지 않는 현실을 고려하면 새로운 설계도를 제시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해석이 나올 수 있다.

결국 역대 정부는 같은 선택을 해왔다. 통일방안은 그대로 두고, 접근 방식만 바꾸는 것이다. 박근혜정부의 ‘통일 대박’, 문재인정부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윤석열정부의 ‘담대한 구상’, 이재명정부의 ‘평화공존과 공동성장’ 모두 1994년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전제로 접근 순서와 설명 논리만 다르게 바꾼 정책 기조다. 박근혜정부는 통일을 경제적 기회로 제시하면서 통일의 ‘이익’을 전면에 내세웠다. 문재인정부는 통일보다는 비핵화와 평화 정착을 우선 과제로 정했고, 윤석열정부는 북한의 비핵화를 통일 논의의 전제조건으로 못 박았다. 이재명정부는 장기적 평화공존과 공동성장에 방점을 둔다. 강조점은 다르지만 통일 이후 국가의 모습이나 단계적 경로를 새롭게 구성한 것은 아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통일은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지만, 언제 어떻게 할지는 불분명한 과제로 변해 갔다. 통일이 왜 필요한지, 어떤 선택지가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고, 찬성과 반대 의견만 요구받아 온 셈이다.

설명의 부재는 통일 필요성에 공감하는 인식의 하락으로 이어졌다. 통일연구원 국민인식조사에서 통일이 필요하지 않다는 응답은 상승세를 보였다. 2014년 30.7%에서 2017년 42.2%까지 올랐고, 2020년 47.3%를 기록했다. 다음해 41.3%로 소폭 떨어졌지만 다시 점진적으로 상승하면서 지난해에는 절반이 넘는 51.0%까지 올랐다.

◆통일, ‘비싸고, 위험한 선택’(?)

통일에는 돈이 필요하다. 국회예산처는 2015년 통일이 이뤄질 경우 2060년까지 필요한 통일비용을 총 1경428조원으로 추정한 바 있다. 2015년 국회는 남북이 제한적으로 경제협력을 할 경우 약 4800조원, 협력을 확대해 인도적 지원할 경우 약 3100조원, 활발하게 투자할 경우 약 2300조원이 들 것이라는 전망을 제시했다.

통일에 경제적 부담이 따르는 건 분명하지만 통일을 하지 않을 경우 발생하는 비용, 즉 분단이 길어지면서 쌓이는 구조적 비용 또한 엄청나다. 분단이 지속될 경우 엄청난 국방비 지출과 외교·안보 리스크에 따른 비용은 통일비용보다 훨씬 큰 출혈일 수 있다. 한때 분단비용을 따져보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단순한 비용계산만으로 통일의 필요성을 설명하기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대신 논의의 초점이 된 게 ‘통일 편익’이었다. 통일이 되면 성장률 제고, 시장 확대, 인구 구조 개선 같은 긍정적 효과를 수치로 제시해 설득하려는 시도였다. 문제는 통일 시점과 방식, 국제 환경 등 작은 전제 하나만 달라져도 결과가 크게 바뀐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정부는 통일 편익을 단일 수치로 제시하는 데 학술적·정책적 한계가 크다고 보고 공식적인 단일 추계는 제시하지 않고 있다.

하든, 하지 않든 큰 부담일 수밖에 없는 통일은 이제 ‘해도 되는지 따져봐야 할 선택’으로 자리 잡았다. 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원은 “통일 담론이 당위의 언어를 잃으면서, 통일 여부를 개인의 이해득실 차원에서 판단하려는 경향이 확산됐다”고 분석했다. 젊은 세대에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통일의 필요성에 공감하지 않는 비율이 높은 것도 통일의 가치를 부정하기보다는 ‘잃는 것이 더 많다’는 생각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북한을 ‘우리’가 아닌 ‘남’으로 보는 시각이 강해지면서 득실의 계산은 더욱 첨예해질 수밖에 없다. 한국리서치의 지난해 북한 인식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남북을 별개 국가라고 보는 인식이 72%나 됐다. 2023년에는 70%, 2024년에는 68%였다. 같은 기간 남북을 하나의 국가라고 보는 사람은 20% 정도에 불과했다. 남북이 별개 국가라는 인식은 성, 나이, 거주지역, 북한에 대한 호감도, 이념성향과 관계없이 보편화되고 있다. 이는 곧 통일이 당위적 과제가 아니라 자기 삶에 어떤 영향을 줄지를 따져야 하는 대상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김 부연구위원은 통일 담론이 장기적 국가 비전이 아니라 부담과 위험 중심으로 소비되면서 “미래 세대에게 통일이 희망보다 부담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통일이 무엇을 해결하려는 프로젝트인지에 대한 설명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고 있다는 점, 상당한 비용 부담을 수반한다는 점은 결국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통일은 ‘비싼 선택’ 혹은 ‘위험한 변화’로 인식되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