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5일 새벽 5시 경기도 평택시 고덕동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체감기온 영하 12도의 살을 에는 칼바람이 평택 벌판을 휘감았지만, 캠퍼스 내 5공장(팹 P5) 건설현장은 뜨거운 열기로 끓어올랐다. 아직 동이 트려면 한참 남았지만, 수천 개 고광량 투광등이 P5현장을 환하게 밝혔다.
현장 게이트 앞은 출근 전쟁을 치르는 근로자들의 행렬로 장사진을 이뤘다. 안전모를 눌러쓴 수천명 인파가 입김을 내뿜으며 빨려 들어가는 모습이 거대한 파도처럼 보였다. 불과 1~2년 전 공사 속도 조절로 잠시 숨을 고르던 시절의 적막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현장 관계자는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면 하루 투입 인력만 5만명에 달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추위에 잔뜩 움츠린 채 발길을 재촉하는 근로자들 뒤로 하늘을 향해 솟구친 수십 기의 타워크레인이 눈에 들어왔다. ‘철의 거인’들은 이곳이 글로벌 반도체 패권 전쟁의 최전선인 양 결전을 앞둔 군단이 사열하듯 줄지어 있었다.
◆산을 깎아 만든 ‘600兆 요새’
오전 8시쯤, 평택을 벗어나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에 다다랐다. SK하이닉스의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가 들어설 이곳은 그야말로 천지개벽을 방불케 했다. 415만㎡(약 126만평)에 달하는 광활한 부지는 산을 깎아 만든 거대한 요새와도 같았다.
건설현장에 들어서자마자 일반 공사장에서는 보기 힘든 초대형 중장비들의 향연이 시야를 압도했다. 국내에 단 60대뿐이라는 40t급 험지 트럭(ADT) 16대가 매일 같이 굉음을 울리며 비포장도로를 질주한다. 지도가 실시간으로 바뀌고 있다는 착각이 들 만큼 거대한 바퀴가 흙먼지를 일으켰다. 일반 굴착기보다 버킷 크기가 3배나 큰 초대형 굴착기들은 쉴 새 없이 발파석을 퍼 담았고, 덤프트럭들은 부지런히 흙을 실어 날랐다.
특히 시선을 확 사로잡은 건 웅장한 골격을 드러낸 첫 번째 팹(공장)이었다. 키가 아파트 50층 높이(150m)에 육박하는 1기 팹은 SK하이닉스의 미래를 책임질 전초기지다. 기존 계획보다 클린룸 면적을 50%나 확장해 HBM4E(7세대) 등 차세대 AI 메모리 생산에 최적화된 기지로 설계됐다. SK하이닉스는 이곳에 총 4개의 팹을 짓기 위해 무려 600조원 이상을 쏟아부을 예정이다. 그만큼 현장의 열기는 뜨거웠다.
한 관계자는 “하루 평균 1만2000명 이상의 인력이 투입되는 1기 팹 공사의 경우 3교대 24시간 체제로 일요일 야간을 제외하고는 멈추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을 달성하며 메모리 시장의 주도권을 거머쥔 SK하이닉스의 자신감이 곳곳에 묻어났다.
◆운명의 날…美의 ‘관세 경고장’
이날 평택과 용인에서 메모리 반도체의 미래가 설계되는 동안 미국에선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반도체 관세 부과를 위한 포고령에 서명했다. 포고령은 미 무역확장법 232조를 근거로 삼성·SK의 HBM이 탑재되는 엔비디아의 H200 등 특정 첨단 칩의 중국 재수출 물량에 대해 25%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게 골자다. 하지만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는 법. 백악관은 “가까운 시일 내에 반도체 전반에 더 광범위한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며 ‘관세 상쇄 프로그램’ 도입을 예고했다.
이후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미국 마이크론 공장 착공식에서 “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하고 싶다면 선택지는 둘 중 하나다. 100% 관세를 내거나, 미국에 공장을 짓는 것”이라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글로벌 반도체 업체들을 겨냥해 노골적인 투자 압박을 했다. 특히 파운드리 세계 1위인 TSMC를 중심으로 대만 반도체 업계가 미국에 2500억달러(약 368조원)를 직접 투자하기로 하고 관세 면제 혜택을 받은 ‘대만 모델’이 공개되면서 한국 기업들의 부담은 가중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미 평택 P5와 용인 클러스터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부으며 국내 생산 거점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의 요구대로 국내 메모리 생산 라인을 당장 미국으로 옮기거나 미국 땅에 추가로 지을 여력이 안 된다. 평택의 타워크레인이 들어 올리는 자재, 용인의 험지 트럭이 실어 나르는 흙더미 하나하나가 삼성과 SK의 사활 건 투자인데 미국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셈이다.
현장 관계자는 “미국이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주다간 국내 투자가 ‘밑 빠진 독’이 될 수 있다”며 “관세 폭탄이 현실화하면 마이크론과의 가격 경쟁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생존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는 수준”이라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에서 발목 잡는 ‘산단 이전론’
밖에서 불어오는 외풍도 매섭지만, 안에서 기업들의 발목을 잡는 ‘내우(內憂)’는 현장의 의지를 더욱 꺾는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권 일각에서 제기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호남 이전론’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아서다.
전북 지역 정치권과 일부 시민단체들은 “용인은 전력과 용수가 부족하다”며 전북 새만금 등으로 클러스터를 이전해야 한다고 연일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심지어 기후에너지환경부 김성환 장관까지 “전기가 많은 지역으로 옮겨야 하는 것 아닌지 고민”이라고 발언하자 삼성과 SK는 속이 타들어갔다.
산업 현장과 데이터는 용인 클러스터 이전론이 ‘현실을 무시한 정치논리’라고 항변한다.
반도체는 ‘물 먹는 하마’로 불릴 만큼 대규모 용수가 필수적이다. 앞서 정부가 수립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용수 공급 사업’에 따르면 용인 반도체 국가산단과 클러스터가 필요로 하는 공업용수는 2035년 기준 하루 약 76만4000t에 달한다. 이는 250만명이 하루에 쓰는 물의 양과 맞먹는다. 반도체 업계와 수자원공사는 이러한 막대한 수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곳은 팔당댐을 낀 용인뿐이라고 입을 모은다.
반면 이전 후보지로 거론되는 새만금 인근 용담댐의 여유 물량은 하루 2만t에 불과하다. 필요량의 3%도 채우지 못하는 수준이다. 업계 관계자는 “(호남 이전론은) 물 없이 농사를 지으라는 꼴”이라며 “반도체 산업은 정치적 명분이 아니라, 단 한 번의 공정 중단도 허용되지 않는 안정성이 생명”이라고 일갈했다.
게다가 용인 클러스터는 이미 토지 보상을 마치고 부지 조성 공사가 상당 부분 진행됐다. SK하이닉스 1기 팹 부지는 이미 조성이 완료됐고, 전력 공급을 위한 변전소 공사도 한창이다. 수조원의 매몰 비용은 차치하더라도, 클러스터를 보고 용인과 인근에 둥지를 튼 램리서치, ASML 등 글로벌 선도 장비 기업들과의 신뢰가 무너질 수 있다.
반도체 업계의 한 고위 임원은 “미국은 자국에 공장을 지으라며 관세라는 칼을 들이대고, 대만과 일본은 국가적으로 총력 지원을 하고 있다”며 “그런데 우리는 건물이 올라가고 있는 국가 전략 단지를 두고 선거 표심을 위해 ‘옮기라’고 흔드는 게 말이 되냐”고 개탄했다.
업계에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생산하는 메모리가 AI 발전의 ‘특이점’이 될 것으로 내다본다. 메모리 성능이 높아질수록 AI 성능도 급속도로 좋아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런 점에서 2026년 ‘AI 3대 강국’과 ‘반도체 초강대국’을 향해 발판을 다지는 중요한 해다. 정부와 정치권이 그 어느 때보다 반도체업계와 머리를 맞대고 협력하는 모습이 절실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