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남정훈 기자] 지난 시즌 한국전력은 외인 공격수가 없다시피 치러야 했다. 시작을 ‘쿠바특급’ 엘리안과 함께 했고, 개막 5연승을 달렸다. 그러나 1라운드 현대캐피탈전 5세트 듀스 상황에서 개막 5연승을 확정짓는 득점을 따내는 과정에서 엘리안은 착지가 잘못됐고, 결국 시즌 아웃됐다. 새 외인을 구하는 과정에서 메디컬 테스트에서 문제가 발견돼 돌려보내는 등 우여곡절 끝에 경력직 마테우스를 데려왔으나 마테우스도 6경기만 뛰고 발목 부상으로 시즌아웃됐다. 36경기 중 외국인 선수가 뛴 경기는 단 11경기에 불과했다. 토종 선수층이 아무리 두터워도 클러치 상황에서 해결사 역할을 해줄 외인 공격수의 부재로 인해 한국전력은 13승23패, 6위에 그쳤다.
2025~2026시즌엔 외인 공격수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리그 최강급 외인인 ‘캐나다 폭격기’ 쉐론 베논 에번스(28·등록명 베논)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득점왕도 노릴 수 있는 페이스로 달려나가고 있는 베논의 맹활약을 앞세워 한국전력이 1~3라운드에서 전패했던 ‘천적’ 대한항공을 잡아내며 2연패에서 탈출했다.
베논은 20일 수원체육관에서 열린 2025~2026 V리그 남자부 4라운드 대한항공과의 홈경기에서 한국전력의 아포짓 스파이커로 선발 출장해 양팀 통틀어 최다인 18점(58.62%)을 몰아치며 팀의 세트 스코어 3-0 완승을 이끌었다. 승점 3을 챙긴 한국전력은 승점 38(13승10패)이 되며 KB손해보험(승점 37, 12승11패)을 4위로 밀어내고 3위로 한 계단 올라섰다.
세터 하승우의 적절한 분배와 결정적인 순간마다 한국전력을 구해내는 포인트를 따낸 해결사 베논의 하모니가 돋보였던 경기였다. 4라운드 초반 중위권 경쟁팀인 KB손해보험과 OK저축은행을 연거푸 꺾어내며 기세를 올렸던 한국전력이지만, 최근 2경기에서 최하위 삼성화재, 6위 우리카드에 풀세트 접전 끝에 2-3으로 패했다. 누구도 방심할 수 없는 상대이지만, 아쉬움은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한국전력 권영민 감독은 지난 15일 우리카드전을 마친 뒤 베테랑 선수들과의 ‘소주 회동’을 통해 팀 분위기 쇄신에 나섰고, 2연패 과정에서 볼 분배가 베논과 속공수에게 쏠렸던 하승우에게 아웃사이드 히터 적극 활용을 주문했다.
하승우는 권 감독의 주문을 받아들였다. 이날 1세트엔 김정호, 서재덕 두 아웃사이드 히터의 공격 점유율이 각각 20% 이상을 기록했다. 베논에게 공격이 몰릴 것이라 봤던 대한항공 블로커들은 흔들렸고, 하승우는 서재덕에게 노블록 퀵오픈을 올려주기도 했다. 김정호와 서재덕이 1세트에만 5점, 4점을 올려준 덕에 베논이 단 3점에 그쳤음에도 한국전력은 쉽게 세트를 따냈다.
2세트 들어 대한항공 블로커들이 양측면을 모두 신경쓰기 시작하자 하승우는 베논의 점유율을 올렸고, 1세트에 28.57%의 성공률로 다소 부진했던 베논은 상대 블로커들의 혼란을 틈타 전매특허인 폭발력 넘치는 점프력을 앞세운 강타와 상대 수비 빈 공간을 노린 연타를 적절히 섞어 2세트 공격 성공률을 69.23%까지 끌어올리며 9점을 몰아쳤다. 베논의 원맨쇼 활약으로 2세트까지 손쉽게 따내며 승기를 잡은 한국전력은 3세트에도 고삐를 늦추지 않고 베논-김정호-서재덕 삼각편대를 고루 활용하며 셧아웃 승리로 일찌감치 경기를 끝냈다. 3라운드까지 대한항공을 만나 단 한 세트만 따내고 아홉 세트를 내주며 철저히 밟혔던 대한항공에게 시즌 첫 승을 따낸 한국전력이다.
경기 뒤 권영민 감독은 “대한항공전을 준비하면서 국내 선수 활용을 높이자고 주문했고, (하)승우가 잘 이행해줬다”라면서 “이틀 뒤 4라운드 마지막 경기인 현대캐피탈전도 잘 준비하겠다. 현대캐피탈이 우리에게 2~3라운드를 내리 져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올 것이다. 4라운드 마지막 경기, 5라운드 첫 경기가 현대캐피탈이기 때문에 2경기를 모두 잡을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라고 각오를 드러냈다.
권 감독은 물론 하승우도 입을 모아 베논을 칭찬했다. 권 감독은 “베논은 기량이나 승부욕, 인성까지 너무 좋은 외국인 선수를 만났다. 어린 선수들에게도 도움을 많이 준다. 오래 데리고 있고 싶은 선수”라고 말했고, 하승우는 “저보다 나이는 동생이지만, 형 같은 선수다. 멘탈적인 부분에서 제게 많은 도움을 준다. 제가 흔들릴 때면 저를 구석으로 데려가서 ‘토스는 네가 하는 건데, 왜 주변 시선을 신경쓰냐’며 혼을 내기도 한다. 도움이 되는 말이라 잘 받아들이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현재 득점 부문 1위(571점)에 올라있는 베논은 2위인 삼성화재 아히(529점)를 넉넉히 앞서고 있어 V리그 데뷔 시즌에 득점왕이 유력하다. 그러나 베논은 득점왕이 되기를 거부한다. 그는 “득점왕이 되지 않길 원한다. 특정 선수가 많이 때려 득점을 많이 내는 건 강팀이 아니다. 게임 플랜도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이다. (하)승우가 다른 선수들을 많이 사용하려고 했던 오늘 모습에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득점왕 욕심은 없다”라고 답했다. 이어 “감독님께서 저와 오래 함께 하고 싶다는 말쓴을 해줘 너무 기쁘다. 저 역시 한국전력을 집처럼 느끼고 있다. 코트 안이나 밖에서 선수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선수가 되고 싶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