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판단을 믿고 선택해야할 때 내가 옳고 너는 틀렸다는 생각 한 번은 되돌아보는 시간 필요 그리움으로만 남겨 두지 않게
히라노 게이치로 ‘후지산’(‘후지산’에 수록, 양윤옥 옮김, 하빌리스)
어떻게 그런 시절을 견딜 수 있었을까? 의아해지고 희미한 두려움을 다시 느끼는 때가 있는데 코로나 기간도 그렇다. 시대적 배경이 그 기간인 소설을 읽을 때 몰입감이 커지는 이유는 지나온 지 얼마 안 됐기도 하지만 ‘집합 금지’ 등 만나고 싶은 사람들 만날 수 없던 어려움과 고통이 생생히 남아 있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소설에서 사건을 만들기보다는 상황에 대해 고민하는 편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인물이 처한 상황 안에서 사건은 충분히 만들어질 수 있다고 여기기에. 그래서 코로나 기간은 앞으로도 소설에서 자주 재구성될 거라고 조심스레 추측한다.
조경란 소설가
서른아홉 살 가나는 자신의 현실을 이렇게 요약한다. 경제적으로는 여유가 생겼지만, 어쩐지 늘 지쳐 있다고. 가나는 ‘만남 앱’을 통해서라도 어른들이 말하는 ‘운명의 사람’을 만나려고 시도한다. 쓰야마는 라디오 방송 작가인데 가나는 “자기를 그리 강하게 내세우지 않고” 신중해 보이는 쓰야마와 만나기 시작한다. 집합 금지 조치가 풀린 2020년 6월 초순에 두 사람은 코로나로 쌓인 우울을 극복하려고 1박으로 온천 여행을 가기로 했다. 가나는 아직도 쓰야마가 “어떤 사람인 걸까” 자문하지만.
자기보다 늘 타인을 배려하는 듯한 쓰야마는 호텔과 식당, 신칸센도 다 예약해두었고 후지산 조망 좌석이라 인기가 많다는 좌석도 가나에게 양보했다. 가나는 사실 후지산에는 관심이 없고 그 좌석 때문에 늦게 출발하는 기차를 선택한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상행과 하행선이 통과 신호를 기다리는 오 분 동안, 가나는 맞은편 기차 안에 있는 한 소녀를 보았다. 초등학교 5학년쯤 돼 보이는 소녀가 가나에게 “엄지손가락을 접고 그걸 남은 네 손가락으로 감싸며 주먹을 쥐어 보였다.” 가해자와 함께 있을 때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보내는 수신호. 가나가 벌떡 일어나 기차에서 내려 소녀를 도와야 한다고 쓰야마에게 말했다.
그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가나를 볼 뿐이었다. 가나는 혼자 기차에서 내리곤 소녀가 탄 상행 기차에 탑승했다. 가나의 도움으로 여학생을 납치하려는 범인을 검거했고 그 과정을 다 보낸 후 정신을 차렸을 때는 다시 기차를 타고 여행지에 먼저 도착한 쓰야마에게 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도와주지 않았다면 여자애가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인데, 쓰야마는 기차에서 내리지 않았고 가나는 그의 인간성과 윤리관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저런 사람과 운명을 함께 할 수 있을까? 그의 거듭된 사과 메일에도 가나는 이별을 선택했다.
다섯 달 뒤 가나는 뉴스 속보를 보았다. 도쿄 지하철역에서 일어난 무차별 살상 사건. 사망자와 부상자 이름에서 가나는 쓰야마를 발견하곤 그가 가해자일 거라고 단박에 여겨버렸다. 그러나 쓰야마 덕분에 그 칸에 탄 아이들은 모두 구조되었다. 가나는 쓰야마에 관한 인터뷰 기사도 읽었다. 원래부터 착한 사람이라는, 정말로 쓰야마씨답다는 표현을 보았다. 가나에게는 쓰야마의 그 행동이 실제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이른바 자신의 윤리성에 대한 증명”처럼 느껴졌다. 이제 크디큰 죄책감이 가나를 사로잡았다.
가나는 쓰야마와 가기로 했던 여행을 혼자 떠난다. 이 년 전 쓰야마가 자신을 따라서 기차에서 내렸더라면 운명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 일 이후 한 번만이라도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면 헤어지게 됐을까? 어떤 선택이 운명을 만드는 것일까? 운명이 그 선택을 내리도록 이끄는 것일까? 이 단편은 여러 겹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다시 제목을 보게 된다. ‘후지산’. 가나는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후지산을 본다. 산자락의 너른 품과 무국적인 분위기로 아득한 시절부터 그 자리에 말없이 자리한. 가나는 깨닫는다. 그립다고. 죄책감과 안타까움은 그리움으로 모인다. 그 역할을 후지산이라는 대자연이 맡았다.
내 판단을 믿고 무엇을 선택해야 할 때가 있다. 그게 타인에 대한, 나만 옳고 상대는 잘못되었다는 판단이라면 한 번만은 시간을 가져봐야 하지 않을까. 그리움으로만 남게 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