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와우리] 막 내리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동맹과 다자기구 기반한 안보
트럼프 2기 들어 대전환 직면
유례없는 불확실성 시대 맞아
리스크 대비 전략적 대응 시급

미국이 스스로 설계하고 주도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질서가 공전의 위기를 맞고 있다. 미국은 동맹을 신뢰의 장치로 묶어 전쟁을 억지하고, 국제규범과 조약을 통해 힘의 사용을 예측 가능하게 만들며, 다자주의를 통해 분쟁 관리와 공공재 생산을 3대 축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동맹과 다자기구가 안전보장의 기본이며, 국제법·조약·기구 등을 통해 구축한 규범과 제도로 세계를 움직이는 시스템이 지난 80년 세계 평화를 지탱해 왔다.

그런데 개방된 시장, 민주주의, 법치주의에 기반한 다자 질서와 자유무역, 개방을 글로벌 번영의 엔진으로 돌리는 핵심 질서 축이 트럼프 2기 행정부 이후 유례없는 대전환의 변곡점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사실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엄밀하게 보면 미국이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막강한 국력을 바탕으로 한 ‘자비로운 패권국(benign hegemon)’으로서 ‘미국이 이익을 얻으면서 규칙을 만들어 함께 지킨다’는 자기 합리화 정치철학이기도 하다.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강했던 이유는 미국의 힘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동맹과 파트너가 미국의 약속을 ‘장기 계약’으로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강준영 한국외국어대 교수·국제전략학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예외주의를 버리고 마가(MAGA) 중심의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면서 이 질서의 문법 자체가 송두리째 바뀌었다. 트럼프에게 국제질서는 공공재(公共財)가 아니라 ‘청구서가 붙은 서비스’이며, 규범은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제약물이다. 동맹들도 거래의 대상으로 보면서 동맹의 신뢰, 다자 규범의 지속성이나 합의의 구속력에 대한 구조적 훼손이 빈번해졌다. 파리 기후 협정은 불공정한 경제적 부담으로 정리됐고, 이란 핵 합의(CPOA)도 미국 국가안보 이익을 보호하지 못한 나쁜 합의로 규정됐다. 국제협정도 국내 정치에 따라 번복될 수 있고, 다자외교가 군사 충돌을 대체할 수 있다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성취도 ‘미국 우선’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문제는 이러한 트럼프식 접근이 계속될 것이라는 데 있다. 미국의 패권을 ‘규칙을 만드는 리더십’이 아니라 ‘상대가 비용을 내게 하는 지배력’으로 재정의했기 때문이다. 이젠 한 발 더 나가 21세기 신제국주의로 여겨지는 서반구 우선주의를 ‘돈로 독트린(Donroe Doctrine)’으로 선언하더니, 연초부터 베네수엘라 마두로 대통령을 축출했고, 66개 국제기구 및 조약에서 탈퇴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덴마크령 그린란드에 대한 영토 야욕도 숨기지 않으면서, 1월 7일에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나에게는 국제법이 필요 없으며. 내 도덕성만이 나를 멈출 수 있는 판단 기준’이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인식하에 작년 1월 20일 취임 후 전 지구촌을 관세전쟁으로 몰아넣은 트럼피즘은 ‘합의’라는 국제정치의 최소 규범도 흔들었다. 특히 가장 큰 핵심 동맹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대해서는 방위비를 ‘연체’하고 있다면서 집단방위 조항도 무시한 채, 러시아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겠다는 취지의 발언까지 한 바 있다. 미국이 결국은 함께할 것이라는 신뢰에 기반한 억지의 심리적 예방효과마저 사라지게 만든 것이다. 또 국제기구를 정당성의 기반이 아니라 주권을 침해하는 장치로 묘사해 다자주의 상징적 권위마저 훼손시켰다. 미국이 떠받치던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질서’에서 ‘불확실성’으로, ‘규범’에서 ‘거래’로 추락하는 중이다.

이 틈을 파고든 나라가 중국이다. 중국은 미국을 대체하고자 하는 야심을 숨기지 않고 있으며 치열한 전략 경쟁을 전개하는 중이다. 트럼피즘이 영원한 것도 아니고, 중국이 과연 선진국들을 포함한 포용적 질서를 구현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하지만 트럼프가 촉발한 국제질서 변화는 단순한 정책 조정을 넘어 규칙 기반 질서에서 힘의 지배로, 다자주의에서 거래주의로, 동맹 협력에서 세력권 정치로의 대전환이 진행됨을 의미한다. 모든 국가에 적용될 유례없는 불확실성과 리스크에 대비하는 우리의 전략적 대응이 시급하다.

 

강준영 한국외국어대 교수·국제전략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