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 민주화운동 희생자 유족의 정신적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2021년 헌법재판소가 5·18 민주화운동 피해자 및 유족의 ‘정신적 손해’에 대한 부분까지 화해가 성립됐다고 정한 옛 광주민주화보상법 조항에 대해 위헌 결정을 하기 전까지 유가족에게는 위자료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장애사유가 존재했다는 취지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22일 서울 서초구 대법정에서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 유족 유모씨 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상고심 선고기일을 열고 대법관 11인의 다수의견으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광주고법에 돌려보냈다.
사건의 쟁점은 5·18 민주화운동 유족들이 갖는 고유의 위자료 청구권이 민법이 정한 단기 소멸시효 3년이 지나 소멸됐는지 여부다.
2021년 11월 유씨 등은 국가를 상대로 정신적 손해에 대한 위자료 지급을 청구하는 이 사건 소송을 냈다. 같은 해 5월27일 헌법재판소가 민주화 운동 관련 피해 중 정신적 손해에 대한 국가배상 청구권을 금지한 개정 전 광주민주화보상법 조항은 위헌이라 결정 내리며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개정 전 법률은 보상금 신청인이 동의한 경우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입은 피해에 대해 재판상 화해가 성립됐다는 ‘화해간주 조항’을 두고, 피해자 측의 배상 청구를 막았다. 하지만 헌재 위헌 결정으로 지금은 ‘정신적 피해’는 예외로 두고 있다.
원고들은 헌재 결정으로 법이 개정되기 전인 1990년부터 1994년 사이에 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 받아 보상금을 지급 받았다.
국가는 유족들이 이 보상금 지급 결정이 이뤄진 때로부터 3년이 지난 후에 위자료를 청구했으므로 민법상 단기 소멸시효가 완성돼 위자료 청구 권리가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1심은 헌재 결정 전까지 유가족들이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법률상 장애사유’가 있었다며 원고들의 위자료 배상 청구권이 아직 살아 있다고 봤다. 그러면서 국가가 1인당 10만원가량의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반면 2심은 유가족 고유의 정신적 손해 배상금인 위자료가 5·18보상법이 규정하는 보상금 지급 대상이 아니었으므로 애초에 헌재 위헌 결정에 따른 ‘법률상 장애’가 없었다며 소멸시효가 완성돼 위자료 청구권이 사라졌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다수의견을 통해 “원고들은 구 광주민주화보상법에 따른 보상금 등 지급결정이 있은 무렵에는 피고의 불법행위와 그로 인한 손해에 대하여 현실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면서도 “이 사건 위헌결정이 있기까지 관련자 가족 고유의 위자료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장애사유가 존재했다”고 인정했다.
1990년대에 보상금을 수령한 유족은 ‘5·18 관련 다시 보상금을 청구하지 않겠다’도 서약했는데, 이에 따라 자신의 고유한 손해를 포함한 일체의 손해배상 문제가 보상금 등의 수령으로 포괄적·종국적으로 정리됐다고 이해했을 가능성이 높아 권리행사를 기대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대법원은 “관련자의 가족이 권리행사를 하지 못한 상황은 국가가 뒤늦게 보상 관련 법령을 제정·집행하는 과정에서 보상의 대상과 범위를 협소하게 규정하고, 보상 절차를 신속히 마무리하려고 하면서 초래한 측면이 있다”고 밝혔다.
이어 “국가배상제도의 목적과 과거사 사건의 특수성 및 그 피해자 보호 필요성을 아울러 고려한다면, 관련자의 가족에게 보상금 등 지급결정일에 자기 고유의 위자료 청구권을 행사할 것을 객관적,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었다고 평가할 수는 없으므로, 보상금 등 지급결정일을 소멸시효 기산점으로 삼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대법원은 헌재 위헌결정을 통해 유족이 보상법에 따른 보상금 등 지급과 무관하게 별도로 고유의 정신적 손해에 대한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점이 법적으로 선언됐다며 “관련자 가족 고유의 위자료 청구권 행사에 대한 장애사유가 비로소 제거됐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원고들은 이 사건 위헌결정일로부터 3년이 경과하기 전에 이 사건 소를 제기하였으므로 원고들의 가족 고유의 위자료 청구권에 관한 소멸시효는 완성되지 않았다”며 “피고의 소멸시효 항변을 받아들인 원심 판단에는 소멸시효의 진행을 막는 권리행사 장애사유 등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판시했다.
다만 노태악 대법관은 “5·18민주화운동으로 관련자와 그 가족들이 겪은 고통에 대하여 충분한 배상이 이뤄져야 하지만, 현재의 법리로서는 가족 고유의 위자료 청구권은 소멸시효가 완성됐고, 이들에 대한 구제는 입법에 의하여 이뤄져야 한다”는 반대의견을 냈다.
노 대법관은 “권리행사를 막는 장애가 법률상 장애인지, 사실상 장애인지에 따라 소멸시효 진행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판례의 확고한 입장”이라며 “그럼에도 다수의견이 판례 변경 없이 사실상 장애임에도 권리행사의 객관적, 합리적 기대가능성이 없다면 소멸시효가 진행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은 판례에 어긋나고, 법적 안정성이라는 소멸시효 제도의 취지에 반한다”고 짚었다.
오경미 대법관은 별개의견을 통해 “피고(국가)의 소멸시효 항변을 받아들여 가족 고유의 위자료 청구를 기각한 부분을 파기해야 한다는 다수의견 결론에는 동의하나, 그 근거를 달리 한다”면서 “가족 고유의 위자료 청구권의 소멸시효는 완성되었으나, 국가인 피고가 소멸시효 항변을 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는 권리남용으로 허용될 수 없다”고 밝혔다.
대법원 관계자는 “대법원은 이번 판결을 통해 민법 766조 1항의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권에 관한 단기 소멸시효 기산점을 정할 때 권리행사의 객관적·합리적 기대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법리를 처음으로 판시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