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방지법상 첫 ‘테러’ 지정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요즘 국회에서 야당에 의해 시도 때도 없이 동원되는 ‘필리버스터’(filibuster)란 원래 무제한 토론을 뜻한다. 구체적으로 소수파 의원들이 원내 과반 다수파의 독주를 막고자 합법적 방식과 수단을 총동원해 의사 진행을 고의로 방해하는 행위가 그에 해당한다.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유명한 필리버스터의 장본인은 1964년 4월21일 당시 야당 국회의원이던 김대중(DJ) 전 대통령이다. 야당 동료 김준연 국회의원 체포동의안의 국회 본회의 통과를 막으려고 DJ는 무려 5시간19분 동안 원고도 없이 쉬지 않고 발언했다. 그러니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정권 시절인 1973년 필리버스터 제도가 폐지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라고 하겠다.

 

2016년 당시 야당이던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의원이 테러방지법 국회 통과 저지를 위한 필리버스터 도중 물을 마시고 있다. 민주당 원내대표이던 이 의원은 무려 12시간31분 동안 필리버스터 발언을 이어갔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그 뒤 43년간 볼 수 없었던 필리버스터가 부활한 것은 박근혜정부 때인 2016년의 일이다. 정부·여당이 테러방지법안 강행 처리를 시사하자 당시 야당이던 더불어민주당이 필리버스터 돌입을 선언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테러방지법안에 완강히 반대하며 여러 이유를 들었다. 그중에서도 국가정보원의 판단만으로 이른바 ‘테러 위험 인물’로 분류할 수 있도록 한 점을 최악의 독소 조항으로 꼽았다. 이후 정권 교체로 문재인정부가 출범하면서 여야 간에도 공수 교대가 이뤄졌다. 현 이재명정부 들어 여대야소(與大野小) 정국이 계속되자 요즘은 야당인 국민의힘 의원들이 필리버스터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테러방지법안을 둘러싼 논란이 한창이던 시절 이재명 대통령은 성남시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 대통령 또한 민주당 소속 정치인으로서 테러방지법안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2016년 2월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국정원이) 테러 혐의자로 지정하면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국민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책상을 엎어서라도 (법안 처리를) 막아야 한다”고도 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민주당은 소수파에 그쳤다. 2016년 3월 초 필리버스터가 끝나자 여당인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의원들은 기다렸다는 듯 단독으로 테러방지법안을 가결했다. 그 직후 치러진 20대 총선에선 민주당 등 야권이 여당을 누르고 승리했으니 흥미로운 대목이라 하겠다.

 

2024년 1월2일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이던 이재명 대통령이 부산 가덕도 신공항 부지를 방문한 자리에서 흉기 피습을 당해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지난 20일 김민석 국무총리가 위원장을 맡고 있는 국가테러대책위원회 회의에서 2024년 벌어진 이 대통령 피습 사건을 테러방지법상 테러로 지정했다. 그해 1월2일 당시 민주당 대표이던 이 대통령이 22대 총선을 앞두고 부산 가덕도 신공항 부지를 방문한 자리에서 60대 김모씨가 휘두른 흉기에 왼쪽 목을 찔린 사건이다. 구속 기소된 범인 김씨가 이미 대법원에서 징역 15년이 확정돼 복역 중인 가운데 뒤늦게 테러 지정이 이뤄진 것은 당시 윤석열정부 국정원이 사건을 축소·왜곡했다는 의혹 때문이다. 2016년 테러방지법 제정 후 특정 사건이 법률상 테러로 지목된 첫 사례다. 정치권에서 “테러방지법을 반대한 이 대통령이 정작 해당 법률에 의한 ‘1호 피해자’가 된 것은 아이러니”란 반응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