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 담 넘나든 민화, 현대 미술로 재탄생하다

갤러리현대, 한국 전통회화 전시 2題

‘장엄과 창의: 민화의 변주’
궁중화와 민화의 서로 스며듦 드러내
케데헌의 ‘까치호랑이’ 해학도 보여줘

전통 회화의 확장 ‘화이도’
작가 6인, 현대미술 언어로 다시 그려
전통은 과거 아닌 현재형 언어 메시지

오랫동안 민화는 지나간 시대에 머물렀다.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거나 전통문화의 한 갈래로 정리되는 데 그쳤다. 그러나 규범보다 감각을, 정답보다 변주를 중시하는 동시대의 시선 속에서 민화는 오히려 가장 현재적인 회화언어로 다시 불려 나오고 있다.

규칙에 얽매이지 않은 구도, 과감한 생략과 과장, 그리고 웃음과 희망이 뒤섞인 화면…. 정교한 원근과 완성도를 향한 서구적 미학이 흔들리고 작가의 세계관과 서사가 작품의 중심으로 떠오른 지금, 민화는 낯설 만큼 선명한 대안을 제시한다. 특히 민화는 ‘한국적인 것’이라는 수식어를 넘어 현대미술의 감각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전통을 그대로 복원하는 대신, 그 안에 축적된 DNA를 끌어내 오늘의 언어로 확장하려는 실험으로 이어진다.

갤러리현대에서 열리는 ‘장엄과 창의: 한국 민화의 변주’ 전시 전경.

서울 종로구 갤러리현대는 조선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한국 전통회화의 과거와 현재를 조명하는 두 개의 전시를 동시 개막하며 새해 첫 전시장의 문을 열었다. 본관에서 열리는 ‘장엄과 창의: 한국 민화의 변주’는 궁중회화와 민화 27점을 한자리에 모아 한국의 두 전통회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진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궁중화가 왕실의 권위와 통치의 정당성, 길상과 의례를 엄격한 형식미와 위계 속에 담아내며 정제된 미적 완성도를 보여줬다면, 민화는 민중의 삶과 바람, 해학과 상상을 자유로운 화면에 풀어내며 생활의 언어로 기능해 왔다.



전시는 이처럼 대비돼 온 두 회화를 고정된 범주로 나누기보다 도상과 형식, 제작 환경의 이동 속에서 서로 스며들고 변주돼 왔다는 점에 주목한다. 조선 후기 도화서 화원들이 궁궐 안팎을 오가며 활동했던 사실, 궁중화의 스케일과 완성도를 갖춘 민화의 존재는 두 전통이 분리된 채 존재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궁중의 상징과 형식은 민화로 스며들어 생활의 상상력 속에서 새롭게 발현됐고, 민화의 자유로운 구성과 생명력은 다시 궁중화의 화면을 자극했다.

박방영, ‘본향의 도’(2022).

12폭 병풍으로 가로 713㎝, 세로 169㎝에 달하는 대형 작품 ‘봉황공작도(鳳凰孔雀圖)’가 대표적이다. 전통적인 십장생 배경 위에 일제강점기 무렵 유행한 봉황공작도 도상이 결합된 구성으로, 상서로운 새들이 화면을 가득 채운 이상향은 ‘태평세월’을 상징한다. 형식적으로 궁중화로 보이지만, 도상의 상징은 민화로도 볼 수 있어 궁중화와 민화가 소통하였음을 반증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재력가가 궁중화원에 의뢰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까치호랑이’(19세기).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 속 더피와 수지의 모습이 담긴 ‘까치호랑이’ 그림도 만날 수 있다. 권력의 상징인 호랑이가 거대한 몸을 웅크리고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민중의 상징인 까치를 바라보는 호랑이의 얼굴은 공포와 위엄이 아닌 해학적인 표정이다. 권력의 상징인 호랑이가 민중을 의미하는 까치의 외침을 듣는 정겨운 장면이다. 웅크린 몸과 날카로운 발톱, 거대한 덩치가 긴장을 만들지만, 까치를 바라보는 얼굴에는 무서움과 귀여움이 교차한다. 전형적인 민화의 형태이지만 호랑이 털 표현이나 앉아 있는 모습 등은 매우 독창적이고 기술적 완성도도 높다.

‘호피도’(19세기).

‘레오파드 무늬’의 민화 ‘호피도(虎皮圖)’는 화면을 가득 채운 점무늬가 밀도 높은 구성과 세세한 표현으로 생동감 넘치는 화면을 선사한다. 표범 가죽이라는 구체적 대상을 그린 그림이지만, 현대회화의 단색화처럼 추상적으로 읽힌다. 호랑이는 전통회화에서 벽사(?邪)의 상징이자 권력의 표상이었으며, 나아가 혁신과 용맹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이외에도 이번에 소개되는 여섯 점의 호도(虎圖)는 각각 독창적인 개성과 해석을 가지며, 민화가 동일한 본을 따라 반복적으로 제작된, 창의성이 부조한 노동집약적 회화라는 인식이 일반화된 오류라는 사실을 환기한다.

갤러리현대에서 열리는 ‘화이도’ 전시 전경.

신관과 두가헌 갤러리에서 열리는 ‘화이도(?以道)’는 이러한 전통회화의 흐름을 현재로 확장한다. 김남경, 김지평, 박방영, 안성민, 이두원, 정재은 등 6명의 작가는 과거의 도상과 이미지를 단순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현대미술 언어로 확장해 각자의 방식으로 회화적 실천을 이어간다.

정재은, ‘일월오봉도’(2017).

김지평은 책가도·산수화·장황 등 동아시아 회화의 형식을 고정된 틀이 아닌 시대와 사회적 맥락에 따라 재구성되는 구조로 바라본다. 버려진 회화조각과 장식 요소를 재배치하는 방식으로 주변화된 존재와 누락된 이미지를 호출하며, 전통의 균열에서 새로운 서사를 길어 올린다. ‘디바-무(巫)’(2026)에서는 무당과 여성, 배경으로 밀려난 목소리를 전면화하는 장치를 통해 전통의 바깥에 놓였던 감각을 원형의 다른 가능성으로 연결한다. 민화 ‘호피도’를 참조한 ‘찬란한 껍질’ 연작은 상징성과 추상성을 확장해 호랑이가 지닌 영험함과 서사를 동시대 감각으로 새로 엮는다. 책가도를 변형해 디자인적으로 구현한 김남경의 작품과 물에 비치는 일월오봉도를 통해 상하 대칭의 구조로 전환한 정재은의 작품도 만나볼 수 있다.

이처럼 두 전시는 나란히 배치되며 민화와 궁중화, 그리고 오늘의 회화가 하나의 연속선 위에 놓여 있음을 드러낸다. 전통은 고정된 과거가 아니라 오늘의 시선과 인식의 구조 속에서 새롭게 작동하는 현재형의 언어라는 메시지다. 갤러리현대의 새해 첫 전시는 민화를 ‘옛 그림’이 아닌,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회화적 자산으로 다시 바라보게 한다.

전시는 2월28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