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朴烈)은 근래 그의 아나키즘 활동을 주목한 영화 상영 덕분에 그의 부인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일반 대중에게 아나키스트로 널리 알려졌다.
특히 영화가 박열과 가네코의 활동을 조명하는 가운데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퍼진 괴소문으로 6000여명의 무고한 조선인이 학살당한 사건을 일본 내각의 음모와 연계시킴으로써 일본 사회의 민낯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김태웅 서울대 교수·역사교육
그런데 영화 제목이 ‘박열’임에도 그의 생애 후반부는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영화의 특성상 그리고 부제 ‘조선의 아나키스트’가 말해주듯이 1920년대 박열의 아나키스트 활동만큼 극적인 삶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 인간의 삶을 온전하게 이해하려면 해당 인물의 전체 삶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 특히 그는 6·25전쟁 때 납북된 인물이 아니었던가.
필자가 1977년 2월 중학교 졸업식 때 상장과 함께 부상으로 받은 유홍렬의 ‘국사백과사전’에는 시인 정지용, 역사학자 이능식 등과 달리 등재되어 있었다. 왜 정지용과 이능식, 박열은 동일한 납북자임에도 정지용과 이능식은 기피 인물이 되어 그의 글조차 제대로 소개되지 못하고 이름마저 가려진 반면에 박열은 여기저기 소개되었을까? 물론 박열 역시 여타 납북자와 마찬가지로 출생 연도 ‘1902년’은 표기되어 있지만 사망 연도는 그렇지 못하였다.
그는 1926년 3월 대역범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직후 무기로 감형받아 복역하던 가운데 1945년 8월 해방으로 22년 2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이후 같은 해 11월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을 결성했으며 김구의 부탁을 받아 세 의사(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유해봉환추진위원장으로 그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본국으로 이송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 그는 일본의 민단 정기대회에서 이승만 계열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 노선을 적극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극적인 전환도 6·25전쟁 중 납북으로 인해 빛을 바랬고 이후 근황마저 전해지지 않았다. 그의 가족 역시 신산(辛酸)한 삶을 감내해야 했다.
그런 와중에 1960년대 내외문제연구소가 제공하는 정보에 바탕하여 모 신문이 납북자의 북한 생활기를 소개하는 가운데 박열의 근황도 단편적으로 보도했다. 그가 무정부주의자여서 북한의 사상교육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일화도 소개되었다. 심지어 그의 아들이 육군사관학교에 응시했다는 기사도 나왔다. 이윽고 1970년에는 조총련을 집중 조명하는 기획 보도물이 쏟아지는 가운데 해방 직후 박열의 재일 우익활동을 재조명하였으며 1972년 7월 남북대화를 전후해서도 여전하였다.
특히 북한에서 1974년 1월 17일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장 박열이 향년 73세로 별세했다는 소식을 보도하자 남한에서는 정화암을 위원장으로 하는 유해봉환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유해봉환 의사를 북한적십자회에 전달했다.
그러나 박열 관련 기사는 언제부터인가 신문 지면과 방송에서 점차 사라져 갔다. 물론 재일 조선인 문제라든가 한·일 관계가 불편할 때에는 신문과 방송을 넘어 드라마, 연극으로 소환되기도 하였다. 아나키스트로서 그의 삶이 너무 극적이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남북한의 체제 경쟁과 한·일 관계의 질곡이 그를 현실 정치로 소환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