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평창 동계올림픽 슬라이딩센터에서는 ‘은빛 기적’이라고 할 만한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봅슬레이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한국이 원윤종이 파일럿으로 팀을 이끌고 서영우, 김동현, 전정린이 뒤를 받친 남자 4인승에서 은메달을 따는 놀라운 성과를 끌어낸 것이다. 올림픽 봅슬레이 종목에서 유럽과 북미가 아닌 나라가 메달을 딴 건 한국이 최초였다.
평창 이후 8년, 대한민국 봅슬레이가 다시 한 번 메달의 꿈을 꾸고 있다. ‘전설’ 원윤종의 뒤를 이어 조종간을 잡은 파일럿 김진수(31·강원도청)가 이끄는 대표팀이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에서 2인승과 4인승에 출격해 메달을 향한 힘찬 도전에 나선다. 2인승에선 김형근(27·강원도청), 4인승에선 김형근, 김선욱(26), 이건우(26·이상 강원BS경기연맹)와 호흡을 맞춘다.
봅슬레이는 스피드를 위한 기술이 접목된 스포츠로 ‘얼음 위의 F1’이라 불리는 종목이다. 핸들과 브레이크가 있는 원통형 썰매를 타고 최고 시속 150㎞에 육박하는 경사면의 얼음 트랙을 돈다. 2인승은 썰매를 조종하는 파일럿과 제동을 거는 브레이크맨이, 4인승에서는 파일럿, 브레이크맨과 함께 썰매를 밀고 나가는 2명의 푸시맨이 출전한다. 모노봅(1인승)은 혼자 썰매를 밀고 조종하고 제동까지 한다. 올림픽에서는 남자 4인승과 남·여 2인승, 여자 모노봅 등 4개의 금메달이 걸려 있다.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 당시 원윤종 팀에 브레이크맨으로 합류했던 김진수는 이제 썰매의 맨 앞자리에서 팀을 이끄는 ‘파일럿’으로 완벽히 거듭났다. 전문가들은 김진수의 가장 큰 강점으로 ‘브레이크맨 출신 특유의 감각’을 꼽는다. 썰매의 뒤편에서 전달되는 미세한 진동과 무게 중심의 변화를 몸으로 기억하고 있기에, 조종간을 잡았을 때 썰매 전체의 흐름을 읽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다. 이는 원윤종이 보여주었던 정교한 라인 분석력에 김진수만의 폭발적인 스타트 능력이 더해진 ‘완성형 파일럿’의 탄생을 의미한다.
이번 밀라노·코르티나 동계올림픽의 봅슬레이 경기가 열리는 이탈리아 코르티나담페초 슬라이딩센터는 한국 팀에 기분 좋은 기억을 선사한 곳이다.
2025년 11월, 이곳에서 열린 1차 월드컵에서 김진수 팀은 4인승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는 한국 봅슬레이 역사상 4인승 종목에서 거둔 월드컵 첫 메달이다. 특히 올림픽이 열릴 바로 그 트랙에서 독일의 ‘썰매 황제’ 프란체스코 프리드리히와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 김진수 팀의 2인승 세계랭킹은 5위, 4인승은 8위로, 당일 컨디션과 스타트 기록에 따라 충분히 포디움을 노릴 수 있다는 기대가 부풀고 있다. 특히 2인승 팀은 지난 18일 독일 알텐베르크에서 열린 월드컵 마지막 7차 대회에서 4위에 올랐다. 동메달을 딴 독일의 프리드리히 팀과는 0.47초 차이였다. 2인승 팀은 이번 시즌 7차례 월드컵에서 메달 획득엔 실패했지만, 올림픽 트랙에서 치른 1차 대회를 포함해 총 4차례 4위에 올라 메달권에 근접했다는 평가다.
메달을 꿈꾸는 김진수 팀이 올림픽을 앞두고 주력하고 있는 것은 스타트 기록 단축이다. 봅슬레이 경기에서 스타트 기록의 0.01초 단축은 결승선에서의 0.03초 이상의 차이로 이어진다. 김진수 팀은 그래서 ‘스타트 극대화’에 사활을 걸었다. 하계 훈련 동안 육상 단거리 선수에 버금가는 순발력 훈련을 소화했고, 이는 월드컵 시리즈에서 상위권 스타트 기록으로 증명되었다.
김진수는 “코르티나담페초 트랙은 올림픽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숙련도가 모두에게 비슷한 정도”라며 “스타트에 자신이 있으니 메달을 바라보고 있다”고 출사표를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