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생자는 구원의 끝이 아니라 방향이었다
기독교 구원사의 출발점에는 언제나 하나의 선언이 놓여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요 3:16). 이 문장은 신앙 고백인 동시에 인류 구원사가 어떤 방식으로 시작되었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구조적 진술이다.
기독교는 왜 수많은 예언자나 의인 가운데서 ‘독생자’라는 단 하나의 존재를 통해 구원의 문을 열었을까.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 창조와 타락, 회복과 완성이라는 거대한 서사 속에서 왜 ‘하나’가 먼저여야 했는가를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유대 전통에서 메시아는 집단적 기대의 산물이었다. 다윗 왕조의 회복, 율법의 완성, 이스라엘의 구원이라는 맥락 속에서 메시아는 ‘민족을 대표하는 한 사람’이었다.
예수는 이 기대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넘어선다. 그는 왕좌에 오르지 않았고, 군대를 이끌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아버지”를 말했으며, “아들”로 불렸다. 여기서 기독교 구원사는 정치적·역사적 차원에서 그 근원을 관계의 회복이라는 더 깊은 차원으로 이동시킨다.
‘독생자’라는 표현의 핵심은 관계다. 독생자는 대체 불가능한 유일성을 뜻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 그 단절을 건너갈 수 있는 존재는 오직 하나뿐이라는 인식이 그 안에 담겨 있다. 다시 말해, 독생자는 하나님 편에도, 인간 편에도 동시에 설 수 있는 존재로 요청되었다. 기독교는 인간의 타락을 도덕적 실패라기보다 존재 질서의 붕괴로 이해했다. 그렇다면 그 회복 역시 제도나 율법의 개선으로는 불가능하다. 구원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사건’이어야 했고, 그 사건은 한 인격 안에 응축되어야 했다. 그래서 구원사는 한 사람에게서 시작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독생자가 곧 완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기독교 구원사는 독생자로 ‘시작’되었지, 독생자로 ‘완결’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십자가와 부활은 결정적 사건이었지만, 동시에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사도행전 1:11)는 약속을 남긴다. 이는 독생자 사건이 완성된 종결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다음 단계를 향해 열려 있는 서두였음을 암시한다.
예수 자신도 자신의 사역을 ‘완결’의 언어로만 말하지 않았다. 그는 혼인 잔치를 비유로 들었고, 신랑과 신부의 이미지를 사용했으며, 성령을 통해 미래의 일을 약속했다. 이는 구원사가 단독적 주체에 의해 종결되는 구조가 아님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다시 말해, 독생자는 구원사가 출발하기 위해 요청된 필수 조건이었다.
기독교가 독생자로 구원사를 시작했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식이 얼마나 급진적이었는지를 보여 준다. 그것은 한 존재를 통해 모든 것을 거는 방식이었다. 동시에 이 선택은 구원사적 긴장을 남긴다. 왜 시작이 독생자였는가, 그리고 그 시작은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 한, 독생자는 신비로 남고 구원사는 교리로만 굳어지기 쉽다.
이 질문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독생자가 구원의 끝이 아니라 방향이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끝’이란 완결 내지 종결을 뜻한다. 예수로 구원은 이미 완전히 끝났고, 이제 남은 것은 개인의 믿음뿐이라는 이해다. 반면 ‘방향’이란 완결이 아니라 지향성이다. 예수 사건은 구원을 종결했다기보다 인류가 나아가야 할 구원의 길을 역사 속에 열어 보인 사건에 가깝다. 그래서 ‘끝’이라고 말할 때 신앙은 확신이 되지만 질문을 잃을 위험이 있고, ‘방향’이라고 말할 때 신앙은 역사 속 책임을 요구하게 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기독교 구원사는 ‘왜 그 시작이 홀로 완성되지 않았는가’라는 다음 단계의 사유를 우리에게 요청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