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로 승화한 부랑자의 삶… ‘지게꾼 시인’을 추억하다

故 김신용 시인을 추모하며

청계천 지게꾼·쪽방 막일꾼·노숙자
혹독한 인생 경험 토해내듯 시 습작
전업시인으로 30여 년 11권 시집 내
“매일 책상 앉을 때 살아있음을 느껴
‘가난한 떠돌이 시인’ 기억해 줬으면”
생전 고인 진솔한 바람 가슴에 남아

두 시간여 차를 몰아 충주의료원 장례식장 안에 들어서자, 흰머리를 가득 이고 환하게 웃는 얼굴의 사진이 대신 맞았다. 영정 사진 속의 얼굴에선 전혀 저승의 그림자를 볼 수 없었다. 같은 동료 시인이자 도서출판 ‘걷는사람’의 김성규 대표가 마치 상주처럼 조문객을 정성스럽게 받고 있었다.

“마지막 무렵에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음식과 물을 먹이려 해도 먹지 않았습니다. 곡기를 끊은 것이지요.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택한 것입니다.” 지난 15일 작고한 김신용 시인의 영정 앞에서 두 번 절을 하고 식당의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자, 시인의 아내 이복자씨가 다가와 마지막 순간을 들려주었다.

부랑 생활과 청계천변 지게꾼, 공사판의 노가다 등 온갖 ‘밑바닥’ 체험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시 세계를 선보여 ‘한국의 장주네’ ‘지게꾼 시인’ 등으로 불린 김신용 시인이 지난 15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그래도 우리 잘 살았지 않았느냐, 라고 곡기를 끊기 전에 제가 말하자 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젠 가고 싶다는 의사 표시를 했지요. 한동안 눈을 감지 않았는데요, 서울 인사동 시절의 친구들이 다녀간 뒤에야 조금 안심하고 가신 것 같습니다.”



부랑 생활과 청계천변 지게꾼, 공사판의 노가다 등 ‘밑바닥’ 체험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시 세계를 선보여 ‘한국의 장주네’(프랑스의 부랑아 출신 작가) ‘지게꾼 시인’ 등으로 불린 김신용(1945∼2026) 시인. 그의 마지막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2년 전 충주 자택에서 가진 인터뷰 끝자락에 시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여기 가난한 떠돌이 시인이 있었구나, 라고 기억해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가난한 떠돌이 시인을 기억해준다면…. 잠시 잊고 있었던 그의 말이 가슴에서 맴돌기 시작하자, 김 시인과의 인연, 그가 남긴 수많은 시들, 그가 들려준 파란만장한 인생이 서서히 되살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중학교 3학년 시절, 토목업자였던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소년 김신용을 파란만장한 운명 속으로 거칠게 내던졌다. 집안이 풍비박산 나면서 중학교도 마치지 못한 채 오랫동안 객지로 떠돌아야 했다.

김신용은 표도 끊지 않고 도둑기차를 타고 상경했다. 서울역에 내리자 한밤중이어서 지하도 안쪽에서 노숙을 했다. 배가 너무 고파서 매혈을 했고, 한 번은 누나를 찾아 부산으로 내려왔다가 우연한 사건에 휘말려 소년원에 들어가기도 했다.

2년 뒤에는 숙식을 해결하고 책을 읽기 위해 일부러 교도소에 수감됐다. 역사 옆에 쌓아둔 철근과 쇠파이프 등을 가져가려 한 혐의로 붙잡힌 뒤 나이를 21세로 속여 징역형을 선고받아 대구교도소로 들어갔다. 그는 교도소에서 어린 시절 마음을 사로잡은 문학책을 읽고 시 습작을 했다.

출소 뒤에는 서울역 앞 양동 쪽방촌에 방을 잡고 청계천의 지게꾼이 됐다. 지게벌이를 해서 돈이 생기면 며칠 남산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습작을 하곤 했다. 10년 넘도록 지게꾼으로 고생했지만 벌이는 변변치 않았고 몸은 피폐해졌다.

 

“한때,/ 지게는 내 등에 접골된/ 뼈였다/ 목질(木質)의 단단한 이질감으로, 내 몸의 일부가 된/ 등뼈.”(‘환상통’ 부문)


어느 날 칼 한 자루와 마스크를 사서 주머니에 넣고 술 한 병을 털어넣은 뒤 부산역 앞 파출소 주위를 배회했다. “너, 왜 이것을 갖고 다니지?” 경찰에 붙잡힌 그의 몸에서 칼과 장갑이 나오자, 경찰은 눈이 휘둥그레져 물었다. “저기 앞 부잣집으로 강도질하려 했습니다.” 신군부가 권력 장악을 위해 음모를 꾸미던 1980년 봄, 그는 강도 예비죄로 다시 부산교도소에서 징역을 살았다.

 

“…살려달라고 더러운 쥐새끼라고 덜덜 떨며 닭꼬지로 꿰어져/ 이틀 밤 물통에 머리를 더 처박고서야 비로소/ 강도예비라는 이름의 자궁행 차표를 손에 쥐고 안도했다./ 그 밤길.”(‘밤길’ 부문)


이때 부산교도소에서 그는 수많은 책을, 많은 거인을 만났다. 시인 김수영, 소설가 김승옥, 도스토옙스키, 카프카, 포크너는 물론 철학자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심리학자 프로이트의 ‘심리학’…. 그는 시집 한 권 분량의 습작을 써냈고, 이후 다시는 시와 헤어지지 않았다.

서울로 다시 올라온 그는 양동에 쪽방을 얻어놓고 다시 막일꾼을 했고, 시 습작도 이어갔다.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대학로의 보도블록을 까는 인부로 일했다. 이때 가난한 화가 이성수의 소개로 가난한 예술가들이 찾던 인사동 술집 ‘실비집’을 알게 됐다.

비 오는 어느 날, 일이 없던 그는 실비집의 구석진 자리에 홀로 앉아 술을 마시며 습작을 가다듬고 있었다. 이때 건너편 자리에 앉아 있던 한 사람이 다가와서 물었다. “혹시 지금 읽고 있는 시를 좀 보여줄 수 있습니까?” 그는 흔쾌히 시를 건네주었다. 건너편 사람은 시를 다 읽은 뒤 자신은 시인 지망생 김선주라고 소개한 뒤 시를 좀 빌려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러라고 답했다. 이것이 계기가 돼 최승호 시인의 도움으로 시를 발표하게 된다.

 

“날품팔이지게꾼 부랑자 쪼록꾼 뚜쟁이 시라이꾼 날라리똥치꼬지꾼/ 오로지 몸을 버려야 오늘을 살아남을 그런 사람들에게/ 몸 보하는 디는 요 궁물이 제일이랑께 하며/ 언제나 반겨 맞아주는 할머니를 보면요/ 양동이 이 땅의 조그만 종기일 때부터/ 곪아 난치의 환부가 되어버린 오늘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뼈다귀를 고으며 늙어온 할머니의/ 뼛국물을 할짝이며/ 우리는 얼마나 그 국물이 되고 싶었던지/ …거기 균처럼 꿈틀거리던 사람들 뿔뿔이 흩어졌지만/그러나 사라지지 않는 어둠 속, 이 땅/ 어디엔가 반드시 살아있을 양동의/ 그 뼉다귀집을 아시는지요”(‘양동시편―뼉다귀집’ 부문)


1945년 부산에서 나고 자란 김신용은 1988년 잡지 ‘현대시사상’ 제1집에 ‘양동시편―뼉다귀집’을 비롯해 7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밑바닥 생활을 사실적으로 그리며 ‘부랑의 미학’을 보여준 첫 시집 ‘버려진 사람들’을 시작으로 시집 ‘개 같은 날들의 기록’, ‘환상통’, ‘도장골 시편’, ‘진흙쿠키를 굽는 시간’ 등을 발표했다. 장편소설 ‘달은 어디에 있나’, ‘기계 앵무새’, ‘새를 아세요’ 등도 출간했다. 2005년 천상병시상을 비롯해 노작문학상, 고양행주문학상, 한유성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2년 전 시집 ‘진흙쿠키를 굽는 시간’ 발표에 맞춰 인터뷰를 하면서 시 세계를 설명해달라고 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장성을 중시하는 시들을 주로 써왔습니다. 첫 시집 ‘버려진 사람들’부터 네 권을 보면 제가 살아온 날들이 시가 돼 있고, ‘도장골 시편’부터는 체험을 넘어서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들의 생명력을 노래해 왔지요. 저도 삶속에 들어가면 똑같은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체입니다. 자연이 들어오면서 시가 확대되기 시작했고요. 이번에는 자연과 생명을 넘어서서 사회성과 정치성까지 담으려 했습니다.”

그는 등단 이후 시에 온전히 복무했다. 결혼한 뒤에는 전업으로 시를 쓰기 위해 집값이 싼 서울 변두리를 전전하다가 소설 ‘고백’을 발표하고 받은 돈으로 우이동에 첫 전세방을 얻었다. IMF 이후에는 전세금을 빼서 완도의 신지도로 들어가 돈이 떨어질 때까지 시를 썼고, 2005년부터 10개월간 충주의 도장골에 머물기도 했다. 이후에도 서해의 소래염전지대가 있는 섬말, 경기도 양평 끝자락의 용두리 등을 거쳐 최근에는 충주에 자리를 잡고 시작에 몰두했다.

“열한 권의 시집을 발표하는 지난 30여 년 동안 하루라도 책상 앞에 앉아있지 않는 날이 없었습니다. 시를 쓰든 안 쓰든 책상 앞에 앉아 있었어요. 책상에 앉아 있는 순간이 저에겐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살아있음을 느끼는 순간이었고, 그 시간이 없었으면 전 살아있지 못했을 겁니다.”

급하게 차를 몰아 캄캄해진 밤에 귀가한 뒤 한동안 눈을 붙이지 못했다. 결국 거실로 나와 책상에 앉아서 시인의 시집들을 펴들어야 했다. 시인처럼. 시인의 마음으로. 그런데 이때 막 결혼한 시인이 책상 위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는 게 아닌가. 전날 밤 9시쯤 취침에 든 그는 30년 넘도록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철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리하여 발견하고 대면하고 사유했을 것이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자들을, 몸속에 차오르는 새로운 생의 의지를, 우주의 암흑물질 같은 당신을….

 

“제발, 그 끈질긴 생의 마지막이 끓이는 무념만이라도 따뜻하기를/ 생의 천변에 고인, 지나간 시간의 한순간만이라도 아름답기를”(‘적滴-천변’ 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