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인격의 결합을 요청하는 구원의 구조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는 하나의 역설이 놓여 있다. 예수는 분명 결정적 구원 사건의 주체였지만, 기독교 구원사는 그를 “완성자”로만 고정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다시 오시리라”는 미래 시제를 신앙의 중심에 둔다. 만일 독생자가 모든 것을 완성했다면, 왜 구원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가. 여기서 말하는 ‘미완’은 예수의 부족이나 실패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구원사가 역사 안에서 단계적으로 전개되며, 개인을 넘어 관계와 질서로 확장된다는 의미에서의 ‘열려 있음’이다. 이 역설은 예수의 능력이나 신성을 의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의 사명이 무엇이었는지를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함이다. 기독교는 예수를 통해 구원이 시작되었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인류의 고통과 분열, 역사적 비극이 계속되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는 곧, 독생자의 사역이 ‘결정적’이었으나 ‘종결적’이지는 않았다는 신학적 긴장을 내포한다.
예수의 생애에서 가장 분명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가 홀로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가족 공동체를 이루지 않았고, 신부를 맞지 않았으며, 자녀를 남기지 않았다. 기독교는 이를 성결과 헌신의 상징으로 해석해 왔지만, 동시에 이 사실은 구원사의 구조적 한계를 암시한다. 성서가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구원의 은유는 관계와 결합의 수사이기 때문이다. 즉 ‘홀로’란 결혼의 유무를 떠나 구원의 주체가 단독으로 서야 했던 역사적 형식을 가리킨다. 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구원의 상징은 결코 단독적이지 않다. 창조는 남자와 여자의 결합으로 시작되었고, 구약의 언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로 서술되며, 예수 역시 하나님 나라를 혼인 잔치에 비유한다(마 22장). 신랑은 등장하지만, 신부는 끝내 역사 속에서 실체를 갖지 못한 것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로 불렸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그 신부는 여전히 상징적 공동체의 자리에서 머무르기 쉽다. 이 부재는 상징의 공백이라기보다 구원사가 아직 완결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구조적 징후다.
초대교회의 신학을 형성한 사도 바울 역시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엡 5:25–27)로 비유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상징적 공동체의 차원에 머문다. 물론 성서와 교회사에는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브리스길라와 뵈뵈, 수많은 여성 순교자와 신비가들처럼 결정적 신앙의 순간을 증언한 여성 인물들이 풍부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의 역할은 대체로 개인적 신앙 고백과 공동체 내부의 헌신으로 남았을 뿐, 인류 구원사가 관계의 질서로 실체화되는 구조적 주체로까지 제도화되지는 못했다. 여기서 말하는 ‘여성 주체’란 인류 구원이 개인의 구원을 넘어 관계와 질서의 차원으로 완성되는 구조적 자리를 가리킨다. 그런 의미에서 독생자는 인류 구원의 문을 여는 결정적 사역을 감당했지만, 인류 전체를 실체적으로 재창조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것은 실패라는 말이 아니다. 구원사는 여전히 역사 속에서 열려 있음을 말하는 미완의 언어다.
예수 자신의 언행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는 “내가 할 말이 아직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한다”(요 16:12)고 말했고, “성령이 와서 장래의 일을 알게 하리라”(요 16:12–13)고 했다. 이는 자신의 사역이 모든 것을 끝내는 최종 단계가 아님을 스스로 인정한 고백으로 읽을 수 있다. 독생자는 모든 것을 쏟아부었지만, 그 뜻을 온전히 수용할 역사적 조건과 인간의 그릇은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독생자가 홀로 완성되지 못했다”는 말은 예수가 감당했던 역할의 무게를 정확히 이해하려는 시도다. 독생자는 구원을 ‘결정적으로 시작’했지만, 구원은 본래 ‘관계와 질서의 재창조’이기에 단독적 인격의 사역만으로 종결되는 성격의 사건은 아니었다. 그는 시작자였고, 방향 제시자였으며, 인류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몸으로 보여 준 존재였다. 그러나 방향이 제시되었다고 해서 목적지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인류 구원사에서 구원은 개인의 죄 사함에서 멈추는가, 아니면 인류 전체의 관계 질서가 새로 창조되는 데까지 나아갈까. 만일 후자라면, 구원은 더 이상 단독적 주체의 희생만으로 완성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독생자는 종결점이 아니라, 다음 단계를 요청하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요청이 ‘재림’이라는 개념을 불러낸다. 재림은 독생자의 반복이 아니라, 독생자가 열어 놓은 구원사의 빈자리를 채우는 사건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