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기소된 양승태(78·사법연수원 2기) 전 대법원장에게 항소심에서 재판 개입에 대한 직권남용 혐의 일부가 유죄로 인정되며 징역형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전직 대법원장이 기소돼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례다.
항소심은 “재판사무를 지원하는 사법행정권자의 행위가 실질적으로 재판에 개입하거나 영향을 미치는 것일 때는 사법행정권을 남용한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사법행정권자에게 ‘재판사무 핵심영역’에 개입할 직무 권한이 없어 직권남용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본 1심 논리를 반박한 것이다.
서울고법 형사14-1부(재판장 박혜선)는 30일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혐의로 기소된 양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69·12기) 전 대법관에 대해 1심의 무죄 판결을 뒤집고 각각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고영한(71·11기) 전 대법관에게는 1심과 마찬가지로 무죄가 선고됐다. 박·고 전 대법관은 양 전 대법원장 재임 시기 법원행정처장을 지냈다.
◆‘위헌제청 취소’·‘통진당 재판 개입’ 유죄로 뒤집혀
재판부는 양 전 대법원장에게 적용된 47개 범죄 혐의 중 일부 재판에 개입해 직무권한을 남용했다는 혐의 2개에 대해 유죄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박 전 대법관이 양 전 대법원장과 공모했다고 봤다.
우선 2015년 4월 서울남부지법에 사학연금법 관련 한정위헌 결정을 구하는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취소하게 한 행위는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당시 대법원 수뇌부는 법 해석 권한이 법원에 있음에도 헌재가 한정위헌 결정을 하면 이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인식했다.
이에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은 해당 재판부에 단순 위헌 취지의 위헌제청 결정을 해달라고 요청하고, 기존 결정문과 직권취소 결정문이 전산에서 검색되지 않게 해달라고 했다.
재판부는 이러한 행위에 대해 “재판에 개입하거나 영향을 미쳐 법관의 재판상 독립을 침해하는 것이므로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또 이 전 상임위원이 양 전 대법원장에게 이러한 조치들에 대해 사전보고를 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 공모가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박 전 대법관에 대해서도 박 전 대법관이 주재한 실장회의에서 이같은 조치 등이 결정된 점을 볼 때 역시 공모가 인정된다고 봤다.
2015년 11월 이민걸 당시 행정처 기조실장을 통해 옛 통합진보당 의원들이 낸 행정소송 항소심을 담당하는 서울고법 재판장에게 행정처가 수립한 판단 방법 및 자료를 검토하도록 했다는 혐의도 유죄로 뒤집혔다.
재판부는 이 전 실장이 문건을 전달한 행위가 직권남용에 해당하고, 이로 인해 당시 항소심 재판장의 정당한 재판권 행사가 방해받았다고 인정했다. 또 양 전 대법원장이 이러한 행위를 보고받고 묵시적으로나마 승인했고, 박 전 대법관도 문건 전달 사실을 인식했으므로 재판 개입에 가담했다고 봤다.
이밖의 나머지 혐의에 대해선 1심과 마찬가지로 하급자가 직권을 남용하지 않았거나, 남용했다 하더라도 양 전 대법원장과 공모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죄로 판단했다.
검찰은 2019년 2월 각종 재판 개입, 법관 블랙리스트 작성 등 대내외적 비판세력 탄압, 헌재 상대 위상 강화 시도 등 47개 혐의로 양 전 대법원장을 재판에 넘겼다. 구체적 죄명으로는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공무상비밀누설, 허위공문서작성 및 행사, 직무유기, 위계공무집행방해, 공전자기록위작 및 행사,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국고손실 등이 적용됐다.
◆“형식적 사법 지원 업무여도 재판 영향 미치면 직권남용”
2심이 1심과 달리 일부 재판 개입 혐의에 유죄를 인정한 건 직권남용 성립 범위를 1심보다 넓게 해석했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판례에 의하면 직권남용은 공무원이 일반적인 직무 권한에 속하는 사항에 관해 그 권한을 위법·부당하게 행사하는 것”이라며 “사법행정권자의 행위가 형식적·외형적으로는 법관 등을 상대로 사법 행정과 사무 수행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협조를 요청하는 걸로 보이지만 그 실질은 법원에 계속되는 구체적인 재판에 개입하는 것이나 영향을 미치는 경우에는 정당한 권한 이외의 행위로써 사법행정권을 남용한 직권남용에 해당할 수 있다”고 밝혔다.
앞서 1심은 재판 사무를 ‘재판사무의 핵심영역’, ‘재판 관련 행정사무’, ‘재판 관련 사법지원’으로 구분한 다음 사법행정권자에게는 ‘재판사무 핵심영역’에 개입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직무감독 등의 권한이 없으므로 직권남용이 성립 안 된다고 봤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이러한 1심의 해석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원심(1심)과 같은 구조로 접근하는 경우, 법원에 계속 중인 사건 재판에 대한 제3자의 관여 행위와 같은 ‘위법·부당한 행위를 할 권한’은 애당초 그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므로 제3자의 재판개입에 대해 원칙적으로 어떤 사안에서도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가 성립될 수 없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원심은 재판 독립이라는 중대한 헌법적 가치를 보장하기 위해 그런 논리 구조를 취한 것이지만 그런 논리에 따르면 오히려 ‘재판사무의 핵심영역’에 대한 행위는 언제나 직권남용죄가 성립하지 않는 결론에 이르러 재판 독립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또 법원에서 진행 중인 사건의 재판을 담당하는 법관의 재판권은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가 보호 대상으로 삼는 구체적 권리에 해당한다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사법행정권자가 형식적·외형적으로 직무권한을 행사하는 모습으로 진행 중인 재판에 개입하거나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할 경우 실질적으로는 해당 재판의 결과와 절차가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사건 당사자와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재판이 사법행정권으로부터 독립해 공정하게 이뤄졌는지 의심을 가질 수 있고, 이는 재판에 대한 불신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특히 법관은 재판 주체이면서 동시에 사법부 공무원으로서 사법행정권자의 직무명령에 응해야 하는 이중적 지위를 지녔는데, 어느 지위에서 대응해야 하는지 언제나 분명하진 않다고 설명했다.
또 재판은 외부에서 확인하거나 객관적 지표로 검증할 수 없는 법관의 내면적 사고와 주관적 인식 과정을 거쳐 이뤄지는 점, 재판의 독립과 공정성에 대한 신뢰는 재판 과정에서의 외관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점 등을 고려하면 ‘실질적으로 재판 결과와 절차가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는 재판 공정성 훼손에 대한 의심과 불신을 해소하기에 충분하다고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측 즉각 상고 의사
양 전 대법원장 측은 곧바로 상고하겠다고 밝혔다. 양 전 대법원장의 변호인은 선고 직후 “직권남용죄에 대해 확립된 법리에 반하는 판결이었고, 일부 인정된 사실에 대해선 심리가 전혀 이뤄지지도 않았다”며 항소심 판단에 반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