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가족 여행하면 무조건 펜션 잡아서 삼겹살 구워 먹는 게 ‘국룰’이었잖아요? 이젠 아니에요. 짐 바리바리 싸 들고 가서 요리하고 치우는 것도 일이고요. 차라리 깔끔한 비즈니스호텔 잡고 주변 맛집 도는 게 훨씬 이득이죠.”
직장인 김모(34) 씨의 이야기입니다. 3년째 여행비를 동결했다는 김 씨는 “쓸 돈은 뻔한데 물가는 오르니, 숙소에서 가성비를 챙기지 않으면 여행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토로했는데요. 비단 김 씨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고물가와 경기 침체라는 파고 속에서 국내 여행객들의 선택지가 완전히 바뀌고 있습니다. 펜션과 콘도로 대변되던 과거의 영광은 저물고, 이제 ‘호텔’이 명실상부한 여행의 중심축으로 떠올랐습니다. 현장의 목소리와 데이터를 통해 달라진 여행 지형도를 짚어봤습니다.
◆펜션의 몰락, 호텔의 독주…8년만에 1.8배 성장
1일 여행 리서치 전문기관 컨슈머인사이트가 2017년부터 2025년까지 9년간 연간 2만6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지난해 국내 여행객이 가장 많이 찾은 숙소는 단연 호텔이었다.
10명 중 3명(30%)이 호텔 카드키를 집어 들었다. 이는 2017년(17%)과 비교하면 8년 만에 1.8배나 덩치를 키운 셈이다. 코로나19 발생 전인 2019년을 기준점(100)으로 둔 여행코로나지수(TCI)를 살펴봐도 호텔의 약진은 두드러진다. 지난해 호텔 TCI는 126으로, 6년 전보다 이용이 26%나 늘었다.
한때 가족 여행의 성지로 불리던 펜션과 콘도미니엄은 찬바람을 맞았다. 펜션의 TCI는 83, 콘도는 74까지 곤두박질쳤다. 2019년 대비 20% 안팎으로 이용객이 증발한 것이다. 비용 절감의 최후 보루였던 ‘지인 집’이나 모텔, 민박 역시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23만원으로 버텨라”…초긴축이 부른 ‘가성비 호텔’ 전성시대
이러한 지각 변동의 가장 큰 원인은 ‘돈’이다. 숙소 선택 시 가장 중요한 고려 요소로 ‘비용(22%)’이 꼽혔는데, 이는 코로나 이전 대비 유일하게 중요도가 상승한 항목이다.
컨슈머인사이트 최신 분석에 따르면 국내 여행객의 평균 여행 총비용은 2023년 이후 3년째 23만원대에 묶여 있다.
2020년 이후 물가가 17.2%나 치솟는 동안에도 여행 예산은 사실상 동결된 셈이다. 결국 한정된 예산으로 여행을 떠나려다 보니, 취사 시설이 딸린 비싼 펜션 대신 깔끔하고 합리적인 가격의 ‘3성급 이하 호텔’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실제 데이터도 이를 증명한다. 2017년만 해도 4~5성급과 3성급 이하 호텔 이용 비중은 12% 대 12%로 팽팽했으나, 지난해에는 3성급 이하(16%)가 고급 호텔(14%)을 앞질렀다.
숙소에서 밥을 해 먹는 대신, 잠은 가성비 호텔에서 해결하고 식사는 지역 맛집을 탐방하는 ‘식도락 여행’이 트렌드로 굳어진 영향이다.
◆불황에도 ‘5성급’은 만실…기묘한 양극화
흥미로운 점은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매는 와중에도 ‘초럭셔리’ 시장은 호황이라는 사실이다.
야놀자리서치에 따르면 2025년 4분기 기준 5성급 호텔의 객실점유율(OCC)은 전년 대비 28.6% 급증했고, 객실당 매출(RevPAR)은 무려 39.4%나 뛰었다.
여행 시장이 ‘초긴축’과 ‘초럭셔리’로 극명하게 갈라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평소엔 가성비를 따지지만, 특별한 날에는 아낌없이 지갑을 여는 이중적 소비 행태가 숙박 시장의 양극화를 부채질하고 있다.
호텔이 1위 자리를 굳힌 데에는 단순히 가격 경쟁력만 작용한 것이 아니다. 호텔을 즐기는 방식 자체가 진화했다.
호텔스닷컴의 2025년 조사에 따르면 한국 여행자의 55%가 한 여행 기간 내에 여러 호텔을 옮겨 다니는 ‘호텔 호핑’(Hotel Hopping)을 선호한다고 답했다. 호텔 자체가 하나의 관광지가 된 셈이다.
여기에 반려동물 양육 인구 증가는 기름을 부었다.
한국관광공사 통계를 보면 반려동물 동반 숙박 여행 경험은 2022년 53.0%에서 2024년 60.4%로 꾸준히 늘었다. 과거 펜션의 전유물이었던 ‘펫 프렌들리’ 정책을 호텔업계가 공격적으로 도입하면서, 애견 동반 가족 단위 여행객까지 빠르게 흡수하고 있다.
컨슈머인사이트 관계자는 “호텔이 펜션을 제치고 대표 숙박시설로 자리 잡은 것은 일시적 유행이 아닌 구조적 변화”라며 “합리적 소비를 추구하는 초긴축 트렌드와 위생·편의성을 중시하는 ‘뉴노멀’이 결합해 당분간 호텔의 독주 체제는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